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속 내용을 두고 '웃음은 우리에게 해악인가?'라고 논쟁하고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던 <장미의 이름> 속 14세기 중세처럼 엄숙주의 시대도 아닌데, 이 시대는 참 웃을 일이 없다. 우리는 호쾌하게 웃는 대신, 각종 토크 프로그램의 비아냥거리고 이기죽거리며 조롱하는 것을 웃음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트가 아니라 직설적인 언어의, 상대방에 대한 거침없는 송곳의 한 마디가 '유머'가 된 세상이라 그랬을까. <극한직업>을 보며 한없이 웃다 나오니 이렇게 실컷 웃어본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유머코드가 없는 프로그램이나 작품이 없는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우리가 <극한직업>을 통해 만난 웃음이 오랜만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극한직업>, 그 웃음의 시작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때 웃게 되는 걸까란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속된 말로 우리보다 잘난 놈이 별 것 아님을 스스로 '자폭'하며 드러낼 때, 그리고 그와 반대로 상대방에 대해 굳이 경계를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만만하다 여겨질 만큼 모자라다 느꼈을 때일 것이다. 영화 <극한직업>은 바로 이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 두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경계를 해제시킨다.

웃다가 정든 마약반

영화 <극한직업> 스틸 이미지

우선 해체위기의 마약반. 말이 마약반이지 자신의 기수보다 몇 기수 아래인 동료들이 앞서 진급을 하고 심지어 마약반의 업무조차 다른 부서에게 빼앗기는 형편, 그래서 대놓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반장(류승룡 분)을 위시하여, 장형사(이하늬 분), 마형사(진선규 분), 영호(이동휘 분), 지훈(공명 분)이 그들이다.

대놓고 자신들을 조롱하며 마주한 이웃 수사반에게 그들이 농처럼 던진 '한우 회식'에 기꺼이 끼어드는, 자존심 저리 던진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준 마약반의 첫 씬으로 이미 관객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그들에게 경계심을 늦춘 것처럼 찌질한 그들에게 웃음의 여유를 허락한다.

한우 한 점에 자존심을 버렸지만, 그래도 마약반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이들은 동료에게 읍소하여 얻어낸 정보로 이무배(신하균 분)를 잡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로 예상되는 건물 맞은 편 치킨집에 잠복을 한다. 하지만 잠복이 무색하게 맞은편 건물의 진입조차 녹록치 않은 형편. 치킨 배달부로 위장하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안타깝게도 치킨집이 폐업을 선언하고 그 폐업 선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을 치킨집 점주로 들어앉힌다. 그리고 잠복을 위해 선택한 치킨집이 뜻하지 않은 마형사의 아이템 '수원 왕갈비 통닭'으로 인해 대박이 나게 되는데.

영화 <극한직업> 스틸 이미지

<극한직업> 속 마약반이 주는 웃음의 시작은 캐릭터와 서사로부터 비롯된다. 한우 한 점이 아니라도 언제든 무릎 꿇고 자존심을 헌납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며 딸에게는 호구인 전형적인 소시민 마약반 고반장. 얼굴이 자존심이지만 누구도 그의 그 자존심을 알아주지 않는 수원 왕갈비집 아들 마약반 사고뭉치 마형사. 알고 보니 유일하게 마형사의 얼굴을 쳐주었던, ‘이게 진짜 걸크러쉬지’ 할 수 있는 마약반의 대들보 장형사. 잠복 전문가로서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까칠하지만 그래도 원팀 영호. 범인 검거 한번 못해본 의지 발랄의 지훈까지. 영화 속 그들이 보여주는 웃음은 바로 이 세상사에서 늘 치이거나 밀릴 것만 같은 이 캐릭터들 자체에서 비롯된다.

거기에 배우들이 애써 웃기는 게 아니라, 어쩐지 옆집에 사는 것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데 굉장히 신선한 이들 캐릭터 그 자체가 삶의 궤적 속에서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웃음을 끝없이 자아낸다. 즉, 배수진의 각오로 퇴직금까지 들여가며 마지못해 시작한 닭집, 거기에 마지못해 맞이한 손님에게 고육지책으로 대접한 '수원왕갈비 통닭'이 대박을 난다던가, 그래서 '범인을 잡을 것인가 닭을 잡을 것인가' 딜레마에 빠지고, 그럼에도 범인을 잡겠다며 대박을 포기하고 들이닥쳤지만 맞닥뜨린 허무한 결과라던가, 이제 정말 포기하고 닭집이나 하려고 했더니 제 발로 들어가게 된 사건이라던가, 인생의 아이러니함 속에 던져진 캐릭터들의 충실한 변주가 억지가 아닌 웃음을 만들어낸다.

영화 <극한직업> 스틸 이미지

그저 웃기기만 하는 게 아니다. 처음엔 자존심은 길 바닥에 내어던져 놓은 것 같은 이들이 좀 많이 모자라 보였는데, 그럼에도 퇴직금까지 던지며 해체 위기에 놓인 자신들의 팀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면면에 정이 들어간다. 그들의 잔꾀나 계략은 늘 어설프거나 운이 나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늘 자신의 삶에 우직할 정도로 충실하다. 그게 형사일 때나, 닭을 튀기거나 양파를 썰거나 닭집 테이블 세팅을 하거나, 심지어 잠복하다 달려가 파를 사올 때에도 달라지지 않는 그 '태도'가 그저 우습게만 보이던 그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재밌는 이야기, 더 재밌는 배우들의 연기

심지어, 알고 보니 이들이 그저 골칫덩어리 찌질 군단이 아니라, 팀장이 애써 모아놓은 '어벤져스(?)’라는 반전마저도 여느 히어로물과 달리 이들답게 몸을 던져 처절해지면서 일관성 있는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어쩌면 <극한직업>을 보고 나왔을 때 흐뭇하게 재밌었다는 감정은 바로 이런, 조금은 부족한 듯한 이들이 말 그대로 고진감래했다는 소박한 성취가 주는 공감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물론 우직하지만 늘 치였던 마약반답게, 이들의 '고진감래'는 처절하다. 그 처절함의 정수는 물론 당연히 마지막 길다싶은 선과 악의 결투로 정점을 찍으며 수사물로서의 서비스를 놓치지 않는다.

영화 <극한직업> 스틸 이미지

그래서일까, 심지어 이대로 끝나고 싶지 않다.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마약반을 한번 더 보고 싶다는 맘이 들 정도가 된다. 마치 6,70년대 인기를 끌었던 구봉서 선생 등이 출연한 휴먼 코미디 영화처럼, 이른바 서민 혹은 소시민이라 지칭되는 이들의 삶에 근거한 <극한 직업>은 우리 역시 일상의 삶에선 늘 이들처럼 좀 모자라고 치이며 살아간다는 공감의 웃음으로 호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최근 딜레마에 빠진 한국 영화계가 주목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이렇게 공감어린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이 몫이 크다. 반가운 류승룡의 힘 뺀 열연, 이제는 대세다 싶은 진선규의 마형사, 섹시할 때보다 훨씬 더 빛난 이하늬, 동룡이의 그림자를 벗어난 이동휘, 존재감을 인정받은 공명까지. 이 신선한 조합과 이들의 새로운 열연이 이병헌 감독이 풀어놓은 그물 속에서 펄떡인다. 전작에서 가끔은 뜬금없다 느껴졌던 감독의 엉뚱한 유머조차 살려낸 공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웃음의 또 다른 포인트인, 잘난 놈이 별 거 아님을 자폭하는 캐릭터로 이무배 역의 신하균과 테드 창 역의 오정세는 감초라기엔 그 역할의 진폭이 크다. 전작 <바람 바람 바람>에서 이미 이병헌 감독과 함께했던 신하균이지만, <바람 바람 바람>의 봉수보다 <극한직업>의 이무배가 더 맞춤옷인 듯 럭셔리한 싸가지 마약업자 이무배 캐릭터는 신하균의 것이었다. 또한 초반부터 활약했던 신하균과 달리 불과 몇 씬이 아니었지만, 스타일부터 시작하여 무식한 테드 창의 오정세는 발군이다. 이 두 사람의,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코믹한 포스가 <극한직업> 속 선과 악, 그 웃음의 균형추를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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