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자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노골적인 언사가 꽤 많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뭐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니 이번만큼은 일단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나탈리>는 한 조각상에 얽힌 사연에 대해 이 조각을 만든 예술가 준혁과 비평을 핑계로 그를 찾아온 민우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준혁은 나탈리라고 이름 붙인 작품만은 절대로 판매하지 않고, 준혁은 나탈리에 대한 사연을 곧 죽어도 들어야겠다고 덤비는 상황을 보면 이후에 펼쳐질 상황에 대해 금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나탈리의 실제 모델이 된 여자는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양방향이든 일방통행이든 간에 둘 모두가 사랑했던 존재라는 걸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이러한 설정을 가지고 과연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탈리>는 일찍이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에서 선보이고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차용하기도 했던, 하나의 사실을 대하는 주관적 기억의 다중성을 모방합니다. 그 결과 준혁과 민우는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나탈리의 모델, 즉 미란의 진면목에 대한 기억이 대조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탈리>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대한 표현과 달리 <나탈리>의 그것에 대해서는 '차용' 대신 '모방'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고 하지만 이 영화는 진짜 말 그대로 그저 모방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상반된 기억이 가져오는 대립이 마지막까지 극에 그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구색 맞추기를 위한 허울 좋은 모방일 뿐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나탈리>에 대한 리뷰는 이것으로 끝을 맺어도 충분합니다.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에 이처럼 영화 전체가 무의미한 이야기의 연속으로 이어질 뿐이니까요. 물론 그 중에서도 압권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꼴사나운 섹스씬인데, <나탈리>는 도무지 관객에게 몰입과 감정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처음 준혁과 미란이 첫눈에 반해 서로에게 맹목적으로 이끌리면서 사랑 -정확히 섹스- 에 빠지는 것처럼 시종일관 성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관객에게 주어진 여지라곤 섹스만을 탐닉하는 두 사람에 불과한데 무슨 영원한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를 논한단 말입니까. 움베르토 에코가 그랬다죠? 쓸데없이 늘어지는 공백의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포르노의 정의가 내려진다고...

제가 어제 쓴 <부당거래>의 리뷰에서 키치를 언급했습니다. 이 어원에 대해 조금 더 길게 설명하자면, 근대에 이르러 먹고살 만한 시기가 오자 중산층도 예술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기 위해 예술품인 척하는 싸구려 작품을 파는 작자들도 나타났죠. 키치란 단어는 이때부터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특권의식에 쩔어 있는 상류층이 예술도 아닌 작품을 탐하는 중산층을 비꼬고 얕잡아보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XX인 척하는 것"을 키치의 정의로 규정한다면, <나탈리>를 그 대표적인 예로 꼽아도 좋습니다.

<나탈리>의 첫 장면은 여배우의 가슴을 근접촬영한 노골적인 섹스씬입니다. 대번에 앞으로 이 영화의 지향점이 무엇이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죠. 거기까진 좋다 이겁니다. 뭐 가끔은 극장에서 에로영화 한 편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3D라니, 이 얼마나 육체적 욕망에 충실한 본능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입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괜히 자기의 주제를 망각한 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린 게 마이너스 백만 점을 먹고 들어갑니다. 까놓고 말해서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관능적이고 도발적이며 퇴폐적인 섹스씬만으로 가득 채웠다면 최소한 저는 지금보다는 이 영화를 더 높이 평가했을 겁니다. 사실 극장에서 제대로 된 에로영화 한번 보는 게 저의 오랜 바람이거든요.

하지만 <나탈리>는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연신 터져 나오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실소였죠. 한편으론 예전에 여고생 그라비아 화보를 내놓으면서 비판여론이 거세자 온갖 그럴싸한 핑계를 갖다 대느라 바빴던 모 업체가 떠올랐습니다.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대한민국에서 여고생을 벗길 생각을 했다면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겨우 한다는 말이 무슨 연예계로의 입문 과정이네 어쩌네 그딴 씨도 안 먹힐 소리나 해대고 있으니 참 가관이었죠.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거 뻔히 다 아는 마당에 무슨 그런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찬 말을 내뱉는지 참... 어차피 그런 변명을 하든 안 하든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돈 벌려고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냐고요? 그럴 용기도 없으면 그냥 입 다물고 계세요. 중간이라도 가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그냥 좀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가증스럽지는 않은데 뭘 그리 에둘러서 표현하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나탈리>는 그냥 3D를 동원하여 관객들의 호기심을 볼모로 하는 에로영화일 뿐입니다. (이는 다수의 극장에서 기꺼이 3D로 상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요즘 Home CGV, OCN 등의 채널에서 자체 제작하는 케이블 방송용 영화 - 예를 들어 <이브의 유혹> - 보다도 못한 수준입니다. 장담하는데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도 <나탈리>는 절대 그런 영화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극장을 못 잡아서 상영하지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한 판국에 어떻게 개봉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시나리오만 봐도 대다수의 악평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나마 시나리오는 건질 것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출은 정말이지... 딱 한번, 섹스씬을 제외하고 주목했던 장면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흥을 깨버리더군요. <현의 노래>도 같은 감독께서 연출하고 계신다니 심히 걱정됩니다. 부디 일각에서 들리는 "<나탈리>는 <현의 노래>에 도입할 3D 촬영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습작이다"라는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입니다. (주경중 감독도 못내 신경이 쓰이셨는지 초반부 준혁과 민우의 대화에서 기준 미달의 완성도를 의식한 듯한 대사를 넣으셨더군요. 남의 작품을 함부로 씹어대는 일은 집어치우란 식으로... 그에 대한 민우의 반격도 있긴 했습니다만...)

배우들의 연기는 예상했던 바에 비하면 좋았습니다. 특히 김지훈이 그랬고, 박현진도 일단 외모가 받쳐주니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이성재는... 솔직히 한숨만 나오더군요. 캐릭터의 기본적인 심리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언제쯤 추락하는 그에게 날개가 돋아날 것인지... 예전부터 너무 정형화된 연기만을 선보이는 것 같습니다.

덧 1) 심의위원회의 변덕이야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젠 음모 노출은 자유롭게 허용이 되는 건가요? 예전엔 예술영화의 경우 간혹 음모 노출을 허용하던데... 설마 <나탈리>를 예술영화로 간주한 건 아니죠? 중세미술에서의 음모 노출은 성적욕망의 발현으로 꼽는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제게 <나탈리>는 역시 에로영화에요.

덧 2) 누군가는 그러시겠죠? "넌 돈과 시간이 남아 도냐? 뻔한 영화에 뭘 기대한 거야?"라고. 굳이 변명을 하자면... 돈 주고 안 봤습니다. -_-; 말이 나온 김에 LGT VIP 고객분들은 잠시 주목하세요. 얼마 전에 알았는데 LGT VIP 고객은 한 달에 한번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더군요. 지금까지 놓친 공짜관람의 기회가 도대체 몇 번이던가... 아오~ 아까워 ㅠ_ㅠ

덧 3) 저는 3D로 보진 않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호기심을 못 이기더라도 더 비싼 돈을 줘가면서까지 3D 관람을 할 정도로 본능에 충실한 놈은 아니랍니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3D로 섹스씬을 보면 어떨까 궁금하긴 합니다.

덧 4) 미처 몰랐는데 여주인공인 박현진의 극중 이름이 오미란이더군요.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오미란이라는 모델이 있었죠. 제 1회 슈퍼모델 대회에서 이소라에 이어 2위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미란과 박현진의 외모가 상당히 흡사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의도적인 거였으려나?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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