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 리>는 전광용의 1962년 작 소설이다. 일제시대 잠꼬대도 일어로 할 정도로 열성 친일이었던 의사 이인국은 해방이 되자 당연히 친일파로 몰린다. 그를 구해준 건 뜻밖에도 진주한 소련군, 대세는 소련이라 생각했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며 친소 노선을 걷는다. 그러다 발발한 6.25로 아내를 잃고 아들조차 소식이 끊기자 청진기 하나를 들고 월남하여 병원에서 미군 및 남한의 고위층을 고객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이제 미국인과 결혼한 딸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약하며 비행기에 오른다.

'카멜레온'에 딱 어울리는 소설의 주인공, 그를 통해 전광용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기회주의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 기회주의적 인물은 소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월 10일 방영된 EBS 다큐 시선 <우리 곁의 친일잔재 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속의 미술가들 역시 또 다른 꺼삐딴 리이다. 소설 속 꺼삐딴 리는 보신에만 급급했지만, 미술계의 이 꺼삐딴 리들이 바로 우리 현대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라는 점이 바로 오늘날 우리 미술계의 딜레마가 되고 있다. 다큐 시선은 이를 추적한다.

만 원짜리 속 세종대왕의 딜레마

EBS1TV <다큐시선>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신년 특집 ‘우리 곁의 친일잔재-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편

시작은 만 원짜리 지폐다.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는 만 원짜리 지폐를 들고 시장으로 간 제작진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이 지폐를 '친일 미술가'가 그렸는데 어떠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화가 난다, 처음 알았다’라며 놀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외려 짜증을 낸다. 그 옛날 밥 먹고 살기 위해 친일 안 했던 사람이 어딨냐며, 이제 와서 그걸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한다. 이미 생존하지도 않는 친일파 미술가들을 이제 와서 들추는 건 정말 의미가 없을까?

만 원짜리 속 세종대왕 영정을 그린 이는 천재 화가로 알려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세종대왕만이 아니라 신라 문무왕, 무열왕, 을지문덕, 임진왜란의 의병장 조헌 등이 그의 손을 통해 구현되었다. 위인들의 영정을 그린 건 김기창만이 아니다. 이당 김은호 화백, 그 역시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대표적 친일파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그의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월전 장우성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정몽주 등 내로라하는 위인을 비롯하여 심지어 유관순, 윤봉길 의사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남산공원의 백범 김구 동상이나 도산 안창호, 안중근 열사의 동상, 그리고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 이는 김경승, 우리 조각계의 독보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형 화가 김인승과 함께 일제 동아시아 건설에 앞장섰던 이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과연 친일파가 자신의 동상을 만들 줄 알았다면 백범 김구 선생은 어떻게 하셨을까?

EBS1TV <다큐시선>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신년 특집 ‘우리 곁의 친일잔재-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편

도대체 입도선매도 아니고, 이들 위인들의 영정이 모두 대표적 친일 미술인들의 손에 의해 그려진 사태는 무엇 때문일까? 바로 미술계판 국정교과서라 할 수 있는 표준영정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위인들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는 박정희 시절 국가에서 정한 표준영정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표준영정 97위 중 14위를 저 세 사람을 비롯한 친일 미술인들이 그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들이 왜군과 싸운 장군, 일본에 저항한 독립투사들까지 그렸다는 사실이다.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은 근대의 대표적인 미술인들이다. 월전 장우성은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서화에 능숙, 한국화의 전통에 기반 한 이른바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화의 전형이라 할 <승무>, <귀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순종 황제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는 <성춘향>, <논개> 등 근대기 채색화단의 대표적 인물로 한국 미술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대접받는다. 이당 김은호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민화풍의 과감한 붓질로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그 명성을 알린 그의 작품 세계는 청년기에서부터 만년 걸레 그림까지 한국 미술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이 만든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린 대가, 채관보국

이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일제시대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31년 일본이 만든 10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입선을 하며 등장했다. 이어 16,7,8,9회까지 화려한 수상 경력에 40년 추천작가로 화려한 이력을 채워나간다. 장우성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32년 입선으로 시작하여 전람회 연속 특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 두 사람의 스승이기도 한 이당 김은호 화백은 일찍이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어 1922년 제 1회 선전에서 입선을 한 이래 30년까지 다섯 차례의 입선과 두 차례의 특선을 거치며 명실상부 조선의 대표적 미술인이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자국의 문전(문부성 미술 전람회)을 본뜬 선전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들이 과연 자신들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준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전시동원체제가 되었다. 각종 공출과 수탈이 횡행했으며, 학병 등의 강제징용과 근로정신대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일본은 전문가들에게 '직역봉공'을 요구했다. 즉, 각자의 직업을 통해 나라에 공헌을 하라는 것이다. 그 방식으로 미술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채관보국',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나라를 도우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노골적인 친일작품이 요구되었다.

김은호는 일본이 직역봉공을 위해 만든 조직인 조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친일파 귀족 윤덕영의 처가 만든 애국부인회가 금붙이 등을 모아 일본에 헌납하는 과정을 그린 <금차봉납도> 등 친일적 내용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장우성은 일본 불교의 수호신인 부동명왕을 친일 잡지에 그리는가 하면 한국인 최초로 1943년 선전에서 국민예술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고, 미영 연합군에 대항하는 내용의 <항마>로 일본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만든 '결전미술 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다. 운보 김기창 역시 식산은행 사보 표지로 등장한 1944년작 <총후병사>,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의 친일 혐의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친일 인사가 받은 3.1 문화상

EBS1TV <다큐시선>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신년 특집 ‘우리 곁의 친일잔재-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편

이 당시 김기창이 그린 작품 중에 1934년 <소국민>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적진육박>이라는 작품이 있다. 남양군도 밀림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군인을 그린 이 작품,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의 구도나 설정이 그로부터 30년 후 베트남 파병 국군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적영>과 흡사하여 '자기표절' 논란이 일었다. 이 자기표절의 30년, 거기엔 바로 일제시대에 이어 해방 후, 심지어 박정희 시대까지 승승장구했던 미술인의 초상이 있다.

지난주 일제 하 교육 영역에서 친일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들이 해방 후 자신들의 친일 행각에 대한 반성 없이 기존에 일궈놓은 업적과 명망에 기대어 매진했듯이, 이들 미술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운보 김기창은 국립 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홍대 교수로 부임하여 우리 미술계의 중추가 된다. 김은호 역시 선전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국전의 추천 작가(1949)를 거쳐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었으며 196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월전 장우성은 우리나라 미술계를 이끈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가 되었고, 역시나 국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된 이들. 자의건 타의건 일제에 협조하거나 친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1960년대 다른 상도 아닌, 3.1정신 선양에 기여한 인물에 수여하는 '3.1문화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건 바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금관문화훈장, 해방기념 문화훈장 등을 받으며 대한민국 미술계 원로로 대접받았다.

친일 미술인에 대한 평가, 그 딜레마

EBS1TV <다큐시선>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신년 특집 ‘우리 곁의 친일잔재-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편

과연 이 반성하지 않은 친일에 대해 후대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의 고백처럼, 팽창 정책을 노골화시켜가던 일본의 식민지민에게 일본의 패망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예술로써 국가에 충성한다는 시대정신을 가진 이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들의 친일을 그 시대를 살아냈던 고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은호의 경우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돌리다 핍박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전력을 들어, 또한 월전은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 선 전람회에 참여하지 않는 등 친일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제에 협조하여 창작해낸 산물이 일제 하 대중에게 미친 '이미지의 힘'(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전한 사상, 즉 일본 군국주의의 전파)이 심대하며, 그들이 친일을 도모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는 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누리지 못한, 심지어 빼앗긴 권리와 혜택에 대한 교훈적 각성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친일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현실은 비판조차 여의치 않다. 이들은 일제 하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해방 후로 이어가며 대한민국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고, 이들이 기른 제자들이 우리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 행적에 대한 제기는 '은덕에 대한 배신'으로 취급되며 불이익을 받기가 십상이다. 정부 역시 친일작가의 표준영정 문제에 대해 해지할 근거가 없다며 발을 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여전히 우리 안의 친일의 뿌리는 깊고, 극복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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