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잔혹한 고문과 가혹행위로 과거 군사정권 인권탄압의 상징과 같은 장소다. 경찰이 관리해오던 이 곳은 2019년 초 행정안전부로 이관된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관리를 맡을 예정이다.

26일 오후 2시 옛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운영을 경찰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기는 이관식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고문 피해자, 희생자 유가족 등 시민사회 인사 약 150명과 이낙연 국무총리,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원순 서울시장, 민갑룡 경찰청장 등이 참석했다.

▲26일 서울 용산구 경찰청인권센터에서 열린 남영동 대공분실 이관식 모습. (연합뉴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0~80년대 군사정권의 고문과 인권탄압 등으로 회자되는 곳이다. 박종철 열사, 김근태 전 의원 등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초를 겪은 인사로 확인된 경우만 391명에 달한다.

서울대 인문대에 재학하던 박종철 열사는 학생운동을 하다 1987년 1월 13일 경찰에 붙잡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경찰은 박 열사에게 민추위 지도위원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과정에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박 열사는 사망했다.

그해 1월 15일 중앙일보는 검찰로부터 단서를 얻어 박종철 열사의 사망소식을 보도했다. 이에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어 "냉수를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당시 부검의였던 오연상 씨로부터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결국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인정했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은 한국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도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다. 1985년 12월 19일 민청령 사건 첫 재판에서 김 전 의원은 그해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김 전 의원의 진술로 신민당을 포함한 민주진영이 연합해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됐고, 이는 전두환 정권을 무릎 꿇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모태가 됐다.

경찰은 지난 2005년 대공분실이 홍제동으로 통합 이전된 후 경찰청 인권센터를 설립해 관리해왔다.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은 6월 항쟁 31주년 기념사에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이관식에 참석한 이낙연 총리는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지어진 뒤 불의한 권력은 민주주의의 싹을 자르는데 이곳을 썼다"며 "그들은 민주화를 꿈꾸며 독재에 저항하던 운동가들을 이곳에서 악랄하게 짓밟았고, 이곳에서 고초를 겪은 민주화 운동가는 이제까지 확인된 분만 391명이나 된다"고 밝혔다.

이낙연 총리는 "어둠에 감춰졌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체는 고 김근태 의원 고문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특히 이곳 5층 509호실에서 빚어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는 1987년 6월 항쟁에 불을 붙였고, 시민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정치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고 말했다.

고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 씨는 "이곳에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에 더디지만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며 "새로 태어날 민주인권기념관이 그러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산 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기 바란다"고 밝혔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날 국민에게 고통을 안기고 공분을 일으켰던 경찰의 뼈아픈 과거에 대해 15만 경찰을 대표해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경찰의 부끄러운 역사가 새겨진 자리가 인권의 장소로 재탄생하는 것을 계기로 경찰도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민주·인권·민생 경찰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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