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지난 2일 래퍼 산이가 공연 도중 관객을 향한 여성 혐오 발언이 논란이다. 산이는 얼마 전에도 ‘페미니스트’, ‘6.9cm’라는 곡에서 여성 혐오 가사로 논란을 빚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논란 후 오른 첫 공식 무대에서 대놓고 ‘워마든 독 페미니스트 no 너넨 정신병'이라 비난하고, 이후 자작곡 ‘웅앵웅’에서 ‘페미나치, 쿵쾅쿵’ 운운하며 여성 혐오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당시 공연 영상을 보면 산이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한다. 산이가 무대에 오른 뒤 일부 관객이 야유를 보내자 "나는 여러분이 좋다. 나를 왜 싫어하냐. 여러분을 사랑으로 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한 관객이 ‘추하다’라고 쓴 인형을 던지자 그는 즉석 랩으로 "너희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건 I don't give a fxxx 워마든 독 페미니스트 no 너넨 정신병"이라고 외친다. 이어 "여러분이 아무리 공격해도 난 하나도 관심 없다"며 "너희가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저는 정상적인 여자를 지지한다"라고도 덧붙인다.

소속사 브랜뉴뮤직 콘서트의 래퍼 산이(사진=유튜브 갈무리)

이 발언들은 즉석 랩인 만큼 래퍼 산이의 관점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전혀 새롭지 않다. ‘Bitch, I don’t give a fxxx and fxxx you’로 대표되는 힙합 내 여성 혐오 클리셰의 나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클리셰로 이뤄진 힙합 문화는 ‘여성 혐오로 쌓은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힙합에는 ‘스웨그(Swag)’라는 개념이 있다. 스웨그의 사전적 의미는 전리품, 약탈품이지만 대중문화, 특히 힙합에서 자기 과시, 허세, 자유로움 등의 의미로 확장돼 쓰이고 있다. 랩에서 돈, 명예, 실력 등을 언급하면 ‘스웨그 부린다’라고 하는 식이다. 최근 Mnet <쇼미더머니777>에서 유명세를 얻은 래퍼 루피의 곡 ‘swag’ 중 가사 ‘열심히 일해 난 돈 써 나는 내 모자를 모아’도 이 스웨그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이 스웨그에서 또 빠지지 않는 것이 여자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bitches(암캐들)’ 이야기다. 이 단어는 일반 노래의 후렴구에 쓰이는 ‘baby’처럼 자주 쓰인다. 루피의 곡 후렴구에도 ‘Gold out of my bitches(내 여자들에게서 나오는 보석)’가 나온다.

힙합에서 이 ‘bitch’가 쓰이는 맥락은 <BET 힙합 어워드 올해의 최우수 트랙> 등 수많은 상을 휩쓸며 큰 인기를 끈 미국 래퍼 빅 숀의 곡 ‘I Don’t Fxxx with You’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을 버린 전 여자친구를 ‘bitch’라고 부르며 ‘I don’t give a fxxx’라고 비난하면서 성공한 뒤 만난 여자들과 잔 경험을 늘어놓는다. 산이가 ‘워마드, 정신병’ 운운하며 ‘I don’t give a fxxx’라고 비난하면서 ‘정상적인 여자’를 지지한다고 발언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힙합 가사 속 여성(bitches)은 본인을 버렸던 X년(꽃뱀), 혹은 자기가 누릴 여성(창녀)다. 모두 여성 혐오라는 같은 뿌리이며 각각 여성 멸시, 성적 대상화를 상징한다. 그래서 이 ‘bitch’는 상대 래퍼를 깎아내리는 ‘디스(diss) 랩’에서 필수적으로 쓰인다. 여성성이 곧 열등한 속성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래퍼 산이(사진=브랜뉴뮤직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

그동안 산이가 노래한 곡들의 많은 주제의식도 그랬다. ‘더 불행했음 좋겠다’ ‘나쁜 X’등의 곡들이 대표적이다. 산이는 ‘페미니스트’ 운운한 비난에서조차 여성 혐오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의 ‘페미나치’, ‘메갈’, ‘쿵쾅쿵’이라는 말은 ‘bitch’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여성 혐오 없이 랩을 못 하느냐’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지금까지 창작된 모든 랩 가사에서 여성 혐오 맥락을 다 지운다고 해 보자. 아니, 최소한 ‘bitch’라는 단어만 뺀다고 해 보자. 어딘가 빈약하고 힘 빠져 보일 것 같은가? 그만큼 힙합 정신이 부실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힙합 정신의 핵심 중 하나는 ‘저항 정신’이다. 이 저항은 약자를 억압하는 기득권을 향해야 성립된다. 불이익을 감수한 용기 있는 발언이며, 그래서 ‘스웨그’로 추앙된다. 하지만 산이는 가부장제 기득권자로서 약자인 여성, 특히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고 있다. 저항 정신이 아닌 강자로서의 폭력이다.

10년이면 강, 산도 변한다고 했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일고 있다. 랩도, 산이도 변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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