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의 곽정환 감독은 올해 가장 주목받은 드라마 연출자이다. 추노가 보여준 새로운 사극 표현은 신선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몇 가지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액션신만은 공들인 만큼의 충분한 미학을 제공했고 그를 액션의 아이콘으로 끌어올리게 했다. 비, 이나영, 다니엘 헤니, 이정진 등 추노보다 한결 업그레이드 된 출연진에다가 동남아시아 올로케이션의 화끈한 스케일은 역시나 부잣집답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비의 액션신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매번 등장하는 추격신은 이 드라마가 죽어도 도망자임을 잠시도 잊지 못하도록 각인시키고 있다. 그것만 보면 도망자는 대단히 성공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들은 많다. 많아도 지나치게 많다. 그것은 액션만이 아니다. 비, 다니엘 헤니, 이정진이 여심을 자극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늘씬한 미녀들이 그 주변에 꼭 등장해 남심도 두드린다. 그러나 드라마는 아직 없다.
도망자를 보면 시간은 정말 잘 흘러간다. 아무 생각 없이 화면에 취해 있다 보면 어느 틈엔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다. 그 점은 추노에 이어 곽정환 표 드라마의 장점이다. 그런데 도망자는 추노보다 훨씬 더 볼거리에 치우쳐 드라마인데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 비주얼로서야 이만한 조합이 없을 것이 분명한 다니엘 헤니와 이나영의 신은 중요한 배경을 설명해야 하지만 이들의 대사는 여전히 어색하고 CF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더불어 집요하게 추격하는 이정진의 집념어린 표정으로 인해 도망치는 비의 모습은 그런 가벼움을 지워지게 된다. 앞으로도 이나영의 사건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친구 케빈의 비밀 등으로 점차 무거워질 것이고 그때의 연기 변신이 어떨지는 아직 단언하기 힘들지만 그조차도 잘 해낼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해준다.
그러나 비와 연결된 조직(?)들이 모두 코믹하게 등장하고 있어 지루함을 주고 있다. 사무실 직원들은 단순한데도 일은 잘하고 있고, 도망자에서 노출을 담당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필요 이상으로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추노의 미친 존재감 성동일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탐정인데 능글맞은 추격자로서 비에게 번번이 속는 역할인 듯하다. 중국의 공형진은 성동일보다 더하다. 이들이 정말 탐정 역할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헐렁한 모습들이다.
이번 주부터 도망자를 쫓거나 도망자가 역으로 쫓아야 할 고현정의 대물이 시작되었다. 권상우라는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미실 고현정의 카리스마는 분명 수목드라마의 강자 KBS를 위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도망자의 화려한 액션에 대항하기 위해 대물 역시도 스케일 큰 사건들을 화면에 담고 있다. 결국 두 드라마의 싸움은 출연진이 아닌 드라마 자체로 승부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도망자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액션과 미남미녀의 볼거리에 함몰된 자세로 일관한다면 대물에 줄곧 수목드라마 1위 자리를 내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볼거리가 많다 못해 넘쳤던 신불사의 실패를 곽정환 PD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또 곽정환 PD의 분발을 기대한다는 뜻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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