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비판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지만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은 참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다. 이런 때일수록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를 복기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위기는 민주평화당의 박지원 의원이 특유의 감각을 발휘해 ‘이영자’로 정리했다. 20대, 영남, 자영업자 집단에서 정권 지지층이 와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할 때 이런 진단은 어느 정도 유효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80%에 육박하는 국정수행 지지율이 다가오는 총선까지 이어지리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의 사례에 비추어보면 지금도 결코 낮은 수준은 아니다. 문제는 이탈층의 구성과 지지율 하락의 속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중도층 이탈의 신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정부에 대한 지지 철회의 흐름 안에 있는 20대 유권자들은 수차례 지적한 바대로 ‘공정성’을 중시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여기서 ‘공정성’이란 정확히 말하면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나만 피해볼 수 없다”는 감각이 극대화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개혁’을 표방하는 정책의 대의를 믿는 게 아니라 ‘피해의 구제’에 주목하는 형태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해왔다. 그간 이어진 논란을 통해 이들은 이 정부가 피해 구제가 아니라 오히려 대의을 위해 개인에게 피해를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을 굳혀가는 중이다.

영남권 유권자들은 원래 보수정당의 오랜 지지자였으므로 현재 정부 여당 지지가 다소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지지 유인이 없다고 한다면 과거의 관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부 정책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체감하며 이해관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보수세력 등이 여론전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운동권 참모들에 둘러싸여 조직된 노동자들만 우대하고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은 외면하며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이상적 주문만 되뇌는 대통령’이라는 상징조작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내놓은 발언들에선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각 부처별로 추린 9개 생활적폐 청산 과제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과제별로 구체적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세심한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본래 이 시기에 ‘반부패’를 말하는 것은 사정정국의 조성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민생대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교육 문제에 대한 발언을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 수능 비중 축소, 내신 학종 비율 확대 등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현실을 말하면서 학사 비리가 해소되지 않는 걸 원인으로 지목했다. 비리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는 국민 여론이 형성되고 있고 그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밖에도 직장 내 갑질 문화 등의 일소를 위해 공공분야를 중심으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구체적은 통계 수치를 예로 들면서 요양병원이 요양급여비용을 ‘먹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재건축 비리 문제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정부가 현장을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니냐고 했을 정도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3차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이런 발언을 두고 현안을 장관들보다 잘 알고 있다는 둥의 다소 낯 뜨거운 미사여구를 덧붙여 포장하였으나, 이면의 ‘정치적 의도’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통령이 민생에 관심이 없고 이상론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이 삶에서 체감하는 문제들에 구체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다.

물 들어 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최근 자동차와 조선 등 제조업에서 일부 지표의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선제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보수언론은 이를 두고 제조업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고 있지만, 방점은 ‘선제적 지원’에 찍혀 있다고 봐야 한다. 자동차와 조선 산업은 특정 지역에서는 지역 사회의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에 ‘선제적 지원’이란 넓은 의미에서 결국 민생대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대통령이 이런 방식으로 개혁과 민생 문제 해소의 연결고리를 찾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긍정적이다. 사실 계속 이런 스탠스가 유지돼야 했다. 어찌됐건 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방선거를 전후로 해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과 탄력근로제 단위 시간 확대, 규제완화 드라이브 등을 개별적인 당위만 갖고 밀어 붙인 것은 이상과 현실을 대립구도로 보는 ‘현실론’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꿈은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럴 경우 개혁의 대의를 근거로 집권한 세력의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 결과가 아군을 찾기 어려운 오늘의 난국이다. 여당은 여전히 국회 내 소수이다. 법관대표회의가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의 탄핵 소추를 검토하자는 결의를 해 공이 입법부로 넘어 왔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누구의 어떤 행위를 탄핵 소추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를 두고 정부 여당과 시민단체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야당들과 끝없는 협상을 반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산안 심사가 정부 의도가 훼손되지 않는 수준에서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입법이 필요한 개혁과제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장관들을 앞에 놓고 국회 핑계를 대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해나가자는 쓴 소리를 한 것은 전형적인 2년차 대통령의 모습이다. 대통령은 의지도 능력도 충만한 시기이지만 공무원은 복지부동하고 국회 상황은 풀리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는 “이제 집권한지 1년 밖에 안 됐다”는 말로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었지만 이제 곧 임기 3분의 1을 지냈다는 얘기가 나오는 시점이 온다.

국회에 기대할 수 없다면 여론에 의존해야 하는데 오히려 최근 벌어진 상황은 정부 여당이 최소한 ‘조직된 여론’은 멀리하겠다는 것에 가까웠다. 기업의 요구도 들어줘야 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동계를 압박하고 자극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한다고 한다. 규제완화를 위해 적극 투자에 나서야 할 대기업들의 대표 격인 삼성은 정부가 손을 들어준 보람도 없이 바이오로직스 문제로 운신이 어려워 졌다. 이 와중에 정부가 경제사회노동위에서 ILO협약 비준에 대한 의지를 조금 보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인 것 같다.

이미 늦은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개혁의 깃발에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논리를 세우고 국정운영 동력을 다잡아야 한다. 스윙보터를 잡기 위한 공학이 아니라 ‘개혁블록’을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게 가능하다면 ‘경제 위기’를 알리는 통계에 일희일비할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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