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통공사 의혹으로 시작된 공공기관 채용비리 문제가 산으로 가고 있다. 보수언론이 전형적인 ‘철밥통’ 프레임을 제기하는 가운데 국회는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대한 국정조사를 할지 말지, 한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를 놓고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한바탕 웃음으로 상황을 관전하는 재미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보는 일도 필요하다.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국정조사 요구서를 공동으로 제출하고 정의당이 국정조사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야4당 공조체제가 이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정의당이 국정조사 범위에 강원랜드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분위기는 미묘해졌다. 다른 야당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자유한국당은 자당 소속 의원들이 직접적으로 연루돼있고 재판까지 받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긍정적인 답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이런 이유로 국정조사를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국정조사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야4당의 원론적 공감대가 이뤄진 시점에 혼자 유턴하는 것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들어진 야권 공조 분위기 속에서 외톨이가 될 수는 없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못할 것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못할 것도 없다”고 했지만 강원랜드를 포함한 공공기관 채용 비리 전반에 대해 국회가 국정조사를 추진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더불어민주당의 동의 여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지켜보고 나서 국정조사를 추진해도 늦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어디까지나 절차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국정감사가 종료된 이후 국정조사 대상과 기간에 대한 야당끼리의 이견 조율을 거쳐 국정조사의 추진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이야 “못할 것도 없다”고 했지만 뒤에 가서 자유한국당이 ‘오리발’을 내밀 가능성은 충분하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자유한국당은 우왕좌왕 할 뿐 입장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오히려 정의당이 선제적으로 자유한국당의 입장 변화를 환영한다며 못을 박는 바람에 더 등 떠밀리는 신세가 된 측면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정의당의 처신은 모처럼 원내 유일 진보정당으로서 재치를 발휘한 영리한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야3당 의원들이 22일 오전 국회 의안과에 서울교통공사 등 공공기관의 고용세습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요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왼쪽부터 자유한국당 이양수, 바른미래당 김수민, 자유한국당 송희경, 민주평화당 이용주 의원. (연합뉴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강원랜드라는 ‘신의 한 수’는 바둑으로 치면 패싸움의 기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한 몸인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의 ‘세습 채용 콜라보레이션’은 아무리 봐도 국지전(局地戰)용으로만 등장한 게 아니다. 일전에도 이 지면에 썼듯 “아마추어적 선의가 기득권의 배를 불려 약자들만 손해를 보게 한다”는 프레임 공세는 보수대통합을 위한 전선 형성이라는 용도가 분명해 보인다. 일종의 ‘포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 23일자 지면에 실린 김대중 씨의 글을 보자. 김대중 씨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힘을 합치면 국회 의석의 과반수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문제로 이것이 쉽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친박이나 반박에 서로가 문 정권보다 더 악(惡)인가 하는 것이 먼저 정리돼야 한다. 문 정권은 참을 수 있어도 서로는 못 참겠다면 야당은 깨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썼다. 또 김대중 씨는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지금 문 정권에 대한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라면서 “‘문재인 대(對) 반(反)문재인’의 전선(戰線)이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대중 씨가 주목하는 ‘반문전선’의 재료는 대북문제이다. 그런데 일부 평론가들의 말을 빌자면 대한민국 보수정치세력의 뿌리는 ‘반공보수’와 ‘시장보수’이다. 이런 구분법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반대는 ‘반공보수’를 묶는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시장보수’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선일보 24일자 지면에 실린 윤희숙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글을 보면 실마리가 잡힌다. 윤희숙 교수는 “국정조사를 주장하는 야당이 밝혀내고 싶어하는 것은 공공 기관 노조가 채용 과정에서 편법을 주도했느냐, 친(親)노조 성향의 기관장이 있거나 기세등등한 노조와의 마찰을 우려한 공공 기관들이 이를 인지하고도 방조하거나 결탁했느냐이다”라면서도 “일각에서는 몇 개 수치와 사례 말고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고 썼다. 보수세력이 만든 프레임의 부실함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 ‘타깃’이 된 민주노총은 보수세력의 주장과 보도가 사실관계와 맞지 않는다는 반론을 연일 내놓고 있다. 조선일보는 일부 보도 내용에 대해 “바로잡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윤희숙 교수 주장의 핵심은 다음 단락에서 드러난다. 윤희숙 교수는 “이러한 의심에 기반을 제공한 것은 그간 고용 세습에 관해 노조가 보인 일관된 기득권 의식”이라면서 “대기업 단체협약의 고용 세습 조항과 공공 기관 노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이미 이들을 기득권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썼다. 윤희숙 교수는 이후의 사회적 대화 및 합의 과정에서 기득권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배제해야 한다며 “정부는 목소리 작은 약자와 더 가까워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윤희숙 교수의 이런 접근은 노조 기득권과 포퓰리즘에 반대한다는 ‘시장보수’의 요구와 정확히 겹친다.

물론 일부 대기업 노조가 단체협약을 통해 특수한 형태로 신규고용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받는 것은 노동조합운동 내의 대표적 악습 중 하나이다. 이런 악습은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상태에서 노동조합이 사회공동체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돌아보기 보다는 스스로의 처우 개선을 곧 사회개혁 요구로 치환하는 경제주의 및 노동조합주의의 한계 속에서 형성됐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보정치와 노동조합 운동의 숙제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공공기관 채용비리 문제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근거는 없다. 가령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24일 한겨레 칼럼에서 과거 비정규직이 사업장에서 ‘허드렛일’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임직원 친인척이 임의 채용되는 경우가 만연했다며 “‘계약직’ ‘임시직’으로 일컬어지는 자리에 회사 임직원 친인척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사업장마다 비정규직들 중에 직원 친인척이 적잖이 섞여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썼다.

이런 보수세력의 행태와는 별개로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이 스스로 돌아볼 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의 핵심 중 하나다. 과거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은 특히 민주노총에 소속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포괄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표성까지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장기간 반복해왔다. 이런 주장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미약한 수준에 머무는 상황임에도 진보정치와 대중적 노동운동조직의 기반이 허물어지면서 이런 주장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이 조선일보 지면을 장식하는 이데올로그들에게 빌미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국무회의에서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합의서에 서명한 것은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보수세력 입장에서 보면 ‘반공보수’와 ‘시장보수’가 손을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되면 연말까지 문재인 정권 대 보수세력이라는 왜곡된 ‘진보 대 보수’ 구도가 강화될 것이고 그러면 진보정치는 ‘범진보’의 하위분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진다.

물론 이런 곤궁함은 당장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패싸움’의 수준을 넘는 대국적(?) 포석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보정치와 노동조합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빈곤 계층 전반을 무엇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대변할 것인가? 선거제도 개혁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답을 낼 수 있는 진보세력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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