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니

<웰컴, 삼바>는 ‘앎’에 대한 영화다. 앎이라니 새삼스럽다고?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난민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알고자 하는가’란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희로애락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고 답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난민 문제 역시 문제의 대상이 된 '그들'에 대한 앎 이전에, 나 혹은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앞서 가버린 사안이 됐다. 그래서 이해의 실마리조차 놓쳐버린 상황, 이즈음에 <웰컴, 삼바>는 그 '이해'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적절한 도움닫이가 될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 그 본연의 난민성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이미지

인간은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생물로 그중에서도 200여 종에 이르는 영장목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한 종에서 유래되었다. 대략 1만~ 160만 년 전 지구에 빙하가 출몰했던 홍적세, 평균 1300㎤의 뇌용적, 거의 수직인 이마 모양, 목 근육이 붙은 면적이 비교적 작은 후두부, 작은 크기의 턱과 이빨, 주걱 모양의 작은 송곳니, 튀어나온 턱끝, 완전한 직립 자세와 보행 자세에 적응한 사지 등을 특징으로 한 유일한 동종의 동물이다.

그런데 이 호모 사피엔스는 '난민'이다. 시작은 아프리카였지만, 그의 발길은 지구라는 땅덩이를 헤집고 다녔다. 가는 곳곳에서 동류의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 같은 영장목은 물론, 아메리카의 버팔로, 모리셔스의 도도새 등을 멸종으로 이끌며 지구별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호모 사피엔스의 거칠 것 없는 '역마살'이 없었더라면 인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카누와 같은 나무배에 의지하여 인도양을 넘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전 정신'은 그 시절에는 신대륙의 정복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에 이르러 대서양의 '보트 피플', 그리고 난민으로 이어진다. 같은 행위와 다른 결과, 거기엔 근대의 산물인 이른바 '국민 국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이 '국가'라는 경계 역시 사실은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로마가 남하하는 게르만 족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어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 국가의 경계라는 것이 결코 고정불변의 가치나 영역이 아니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는 '난민 호모 사피엔스'의 종적 개념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난민, 삼바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이미지

'난민'의 시작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혹은 지역 분쟁, 오랜 가뭄 등의 자연 재해. 하지만 위에서 구구절절 말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곧 '유동성'의 역사이다. 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웰컴, 삼바>도 그랬다.

삼바(오마르 사이 분)의 꿈은 자신의 나라 세네갈 호숫가에 집을 지어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안을 위해 그는 지금 이국 프랑스에서 '난민'의 신세로 단속을 피해 1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아직 집을 짓기엔 이르다. 여전히 고향에는 그에게 돈을 보내라는 독촉 전화를 하는 가족이 있다. 우리가 사는 여느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게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옮겨져 왔을 뿐이다.

하지만 미처 집을 지을 돈을 마련하기도 전에, 아니 프랑스 영주권을 받기도 전에 그만 '단속'에 걸렸다. 10년이나 프랑스에 있었고, 셰프로 일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그는 '추방' 위기에 놓인다. 더구나 10년이나 있었지만 삼촌 외에는 일가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억울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겐 항변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내려진 결정뿐. 다니던 직장도 잃고, 프랑스인인 척 하지만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 다시 '리셋'된 그의 일상.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이미지

어렵사리 난민 수용소를 나온 삼바는 각종 프랑스의 이방인들이 몰리는 일자리로 나선다. 건설 용역, 유리창 닦이, 쓰레기 분리, 백화점 야간 경비 등 그가 전전하는 일자리, 즉 삼바와 같은 이방의 난민들로 채운 일자리는 프랑스 산업의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부분이다. 삼바의 일자리 전전을 통해 뜻밖에도 우리는 선진국가 프랑스를 지탱하고 있는 인적 자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지역의 영세산업단지를 채우고 있는 인력들이 누구인가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과연 그들이 없는 프랑스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갈까?

어색한 정장과 손에 쥐어든 잡지, 그리고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불안정한 삶에서 그럼에도 일관된 건 삼바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난민 수용소 동료의 연인에게 흔들린 그 잠시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북아프리카 출신의 국적을 브라질이라 속이는 동료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고지식하게 일자리를 찾고 쫓기며 여전히 고향의 어머니에게 걱정마시라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앨리스(샤를로뜨 갱스부르 분)의 '번아웃'을 따스하게 위로하는 삼바는 '난민'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면 우리 이웃의 괜찮은 남자이다.

영화 <웰컴, 삼바> 스틸 이미지

<웰컴, 삼바>의 백미는 난민과, 그들을 상담하는 난민 수용소의 상담원들이 함께 파티를 벌이며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이방인, 타자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자라는 격도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점차 한 무리의 사람으로 어우러진다. 거기엔 세네갈인도, 프랑스 인도 없다. 그저 밥 말리를 좋아하고 춤을 사랑하고, 그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이방인과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겠다던 앨리스의 동료 상담자 마누도, 삼바에 대한 호감을 가졌지만 난민이라는 선에 혼돈스러워 했던 앨리스도 '사랑'의 이해 앞에 스스로 선을 거뜬히 넘어선다.

결국 평생을 프랑스인이 되고자 조심했던 삼바의 삼촌은 세네갈로 돌아간다. 그가 원하던 호숫가의 집을 지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삼바는 앨리스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살 길을 얻는다. 결론은 쉬이 낼 수 없다. 교착상태에 빠진 우리의 난민 문제처럼. 살고자 하는 곳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를 과연 근대의 국민 국가라는 틀이 제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류 본연의 DNA를 말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금이 그어진 세상은 소란스럽다. 같은 DNA를 가진 인간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색안경은 씌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웰컴, 삼바>는 좋은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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