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뭔가 하나 잡았다는 느낌이다.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이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문제를 놓고 공동전선을 펴는 양상이다. 단순히 개별 사안에 대한 이슈파이팅이라고 보기엔 기세가 심상치 않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당 관계자들은 18일 오후 국회 행정안전위의 서울시에 대한 국정감사가 진행 중이던 서울시청에 기습 진입하려다 서울시 관계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연출했다. 국정감사에 참석 중이던 자유한국당 의원 8명 중 7명이 시위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정회가 선포됐다.

자유한국당 소속 인사들은 서울시청 1층에서 ‘청년일자리 탈취 고용세습 엄정수사 촉구’ 긴급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 행사의 명칭에 보수세력의 ‘프레임’이 드러난다. 문재인 정권이 민주노총의 지지 획득을 위해 추진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노조 조합원들의 고용 세습을 야기했고 이는 결국 구직 중인 청년들의 피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노조 음서제”란 표현까지 동원하고 있다.

정치공학적으로만 따지면 자유한국당 입장에선 모처럼 좋은 건수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을 민주노총과 연결된 세력으로 규정하고 전형적인 ‘불공정성’ 이슈를 부각함으로써 대중의 여론에 호소하기에 좋은 소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한꺼번에 겨냥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18일 오후 '청년일자리 탈취 고용세습 엄중수사 촉구' 긴급 규탄대회를 위해 서울시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면 보수세력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유에는 최근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치 재편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적을 명확히 해서 ‘우리 편’을 단결시키자는 초보적인 전략에 그친다고 볼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보수정치의 재편은 태극기 부대에서 과거 바른정당 창당을 주도한 세력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구 친박 세력과 탄핵에 찬성한 바 있는 자칭 ‘합리적 보수’ 사이의 견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이 첫 번째로 동원한 것은 거대담론이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취임 이후 자유주의 대 국가주의라는 구도를 제시한 것도 이의 일환이다. 최근에는 조강특위원으로 영입된 전원책 변호사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대통령을 탄핵한 것에는 정치적 정당성이 모자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중도화’가 보수정치의 위기를 불러온 본질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즉, 단순화 하자면 탄핵에 반대한 것은 일리가 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 명확히 선을 긋지 않고서는 대업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이런 주장은 유튜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자타칭 ‘보수논객’ 일부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복권을 위해서는 일단 집권을 해야 하므로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는 게 좋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전원책 변호사의 논리는 이러한 주장을 “보수정치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포장하려는 셈이다.

자유한국당이 꺼낸 두 번째 카드는 인적쇄신이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에서의 인적쇄신론은 구태한 보수정치를 상징하는 친박계를 정리하자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김병준 비대위 이후에는 결이 달라졌다. 당을 위기로 몰아넣은 당사자는 전직 대통령들이 아니라 김무성 의원과 홍준표 전 대표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도에서는 김무성 의원과 홍준표 전 대표가 각각 구태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당하는 ‘새로운’ 인물은 누구인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황교안 전 총리, 원희룡 제주도지사이다. 이들을 과연 새롭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고민스럽지만 어쨌든 당 지도부가 멀리하고자 하는 김무성 의원, 홍준표 전 대표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들처럼 보이는 건 분명하다. 최근 주요 영입 대상으로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각각 국가주의-보수에 대비되는 시장주의-보수, 구 친박 세력 중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부위, 개혁적 보수를 대표는 캐릭터로 비춰진다는 것 역시 주목할 대목이다. 보수통합론 내에서 일종의 세력 균형과 이를 기반으로 한 합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세훈 전 시장의 18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는 이런 구상에 대한 대략적 합의가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세훈 전 시장은 문재인 정부의 독주를 막기 위해 단일화 된 보수 대오가 절실하다면서 “한국당은 물론 바른미래당과 재야의 보수인사가 모두 모여야 시너지가 발휘돌 것이며, 내년 초 한국당 전당대회를 분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또 보수통합에 태극기 부대도 포함되느냐는 물음에는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면서 “그들을 ‘극우’로만 통칭하는 건 반대측 입장에서의 일방적 규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보수세력의 강력한 공세는 보수 통합의 세 번째 카드인 것처럼 느껴진다. 국가가 억지로 주도하는 정규직 전환 등의 이상주의적 정책은 ‘고용 세습’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노조 기득권’만을 강화시킬 뿐이므로 시장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세훈 전 시장은 무상급식 반대를 걸고 주민투표를 추진했다가 시장직을 잃었을 만큼 이런 주장에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도 대비된다.

바른미래당 내의 바른정당 출신 인사들은 일단 자유한국당의 구상에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고 있으나 속내는 복잡한 상황인 걸로 보인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18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태극기 부대”를 극우파로 규정하면서도 황교안 전 총리에 대해서는 “친박의 대표로만 활동할 건지 국민의 대표로 정치의 지평을 넓힐 건지 깊은 성찰을 하시고 정치권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소속인 조원진 의원 복당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굳이 황교안 전 총리까지 통합 불가의 전제조건으로 언급하지는 않은 것이다.

과거 중도적인 경제정책 노선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18일 기획재정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소득주도성장을 “거짓말, 도그마, 사이비 종교집단의 정신승리” 등의 극단적 언사를 동원해 비난했다. 이념에 의한 대결 구도가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자유한국당이 추진하는 보수통합의 이념적 도피처로서의 필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울교통공사든 민주노총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서울교통공사노조는 17일 입장자료에서 정규직 전환 과정에 노조가 개입한 바 없고 실제 자유한국당이 제시한 전수조사 결과 자료에도 문제가 된 108명 중 노조 간부의 친인척은 단 1명 밖에 포함돼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서울시 발표에 따라 외부에도 모두 공개된 내용을 가지고 노동조합이 무슨 비밀정보를 캐냈다느니, 재직자들에게 가족들의 무기계약직 입사를 조직적으로 독려했다는 일부 언론의 추측성 보도는 노동조합을 모함하기 위한 악의적 보도”라고 항변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비리가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비리가 있다면 큰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서울시가 직접 감사할 수도 있지만 보다 더 객관적인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했다”고 했다. 감사 결과 문제가 나오면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처벌을 받으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과정 전부에 대한 전수조사 등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수세력이 지금 문재인 정권과 민주노총에 구 통합진보당 세력까지 결탁한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에는 앞에서 설명한 나름의 곡절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점을 함께 봐야 지금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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