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예보가 맞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화를 낼 때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피해를 예상한 게 맞지 않았으면 다행 아닌가? 어린이집이 휴업을 하고 초등학교 휴교 소식까지 전해진 상황에서 일터는 쉬지 않아 난감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데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기상청이 더 정확한 예보를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태풍이 드러낸 것은 맞벌이와 보육의 문제라는 걸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 중 누군가 육아를 전담하더라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직장 내 보육시설이 더 많은 사업장에 제대로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걱정거리는 절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몇 가지 조건만 더 갖춰져 있었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대안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상주의적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눈앞의 기상청이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게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것 같다. 이렇게 만들어진 삶과 죽음을 가르는 레이스에서 약자는 어쩔 수 없이 도태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16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한국유치원총연합회 비상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이덕선 비대위원장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날씨도 추워지는데 태풍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의 사립유치원 논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립유치원 감사 결과 일부를 공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유치원 원장들의 조직적 여론전 때문에 선거에서 입을 불이익을 걱정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치원에 아이를 맡겨야 하는 부모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사립유치원 원장들에게 그야말로 공분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박용진 의원에게 후원금을 모아 주겠다며 나서기까지 하고 있다.

사립유치원 원장에게 까맣게 속아 넘어간 것도 충분히 화가 나는 일이지만 이 분노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일종의 죄책감과 억울함이다. 수시로 각종 명목의 돈을 요구하는 유치원의 씀씀이에 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설마 그러겠느냐는 안이함과 근거 없는 문제제기를 할 경우 아이가 입게 될 직간접적인 피해를 우려한 어떤 비겁함에 대한 후회가 이러한 감정의 근원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아이가 피해를 입은 셈이 된 것은 부모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하는 일일 것이다. 가장 갑갑한 것은 부모로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이제는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맡길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애초의 문제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은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들 말하는 것일 게다. 이런 인식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다른 아이들을 짓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부모도 있지만 여전히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가장 공감하게 만드는 한 마디는 “우리 자식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이다. 부모가 아닌 이모가 조카를 두고 한 행동이긴 하지만 자기 피붙이가 너무 소중해 남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참사의 유가족들도 있다.

어떤 문제를 두고 이렇게 각자도생과 공동체 회복의 길이 갈릴 때 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게 바람직한 정치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6일 이 사태와 관련해 “어느 유치원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른 곳의 잘못은 없는지, 잘못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은 모조리 알려드리는 것이 옳다”고 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횡령과 비리를 저지른 유치원 원장이 간판만 바꿔 다시 유치원을 열지 못하게 하겠다며 다음 주 중 유치원 비리 재발방지 종합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사립유치원에 대한 전체 감사내용을 실명으로 공개하는 방안에 대략 합의했다고도 한다.

사립유치원 회계 처리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강력한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박용진 의원 등이 발의를 예고한 것처럼 현재 사립유치원에 들어가는 지원금을 용도가 규정된 보조금으로 변경하는 입법 조치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문제가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용인해 온 정부와 시도교육청의 문제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전 정권에서 누리과정을 시작해놓고 재정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정작 지원금에 대하선 통제를 포기한 정치적 맥락도 짚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조치들이 사립유치원 원장 등을 압박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인 ‘정치하는 엄마들’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장하나 전 의원은 비리 유치원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당장 국공립시설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하나 전 의원은 이 정부가 국공립 유치원 취원율을 현재 25%에서 40%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한 점도 언급하고 있다.

즉, ‘장사’를 양심적으로 하라는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거다. 보육과 교육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목표와 지향이 분명해야 한다. 보육이나 교육을 사업으로 만들어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유치원 교사 등에 대한 처우 문제나 직장 내 보육시설 문제, 나아가서는 저출산이나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까지 하나의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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