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좋은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일까?

“예술작품들은 언제나 마주하는 위험, 사람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점까지 이끌고 간 경험의 산물들이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의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 중 일부다. 여기서 ‘위험과 마주하는 경험’이란, 기존의 앎에서 벗어나는 무지의 상태이자 인위적인 의미에서 동떨어진 혼돈을 말한다. 이때 마주한 해방과 자유가 우리에게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해 주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 곧 불변하고 고정된 것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이외수 작가의 시 ‘단풍’은 어떨까? ‘단풍’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절대로 거들떠 보지 말아라. 저 년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저 년이 떠난 뒤에는 이내 겨울이 닥칠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엄동설한, 북풍한설, 너만 외로움에 절어서 술독에 빠진 몰골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여성혐오 논란이 된 이외수 작가 시 단풍 게시물(사진=이외수 작가 페이스북 캡쳐)

이 작품이 논란이 된 것은 시어 ‘화냥기’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에 기반한 관점이 드러난 탓이다. 이에 이외수 작가와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맞섰다.

그런데 예술, 문학에 있어 표현의 자유란 무엇일까? 그저 모든 언어를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자유일까? 그것은 ‘표현의 방종’에 가깝다. 오히려 문학이란, 특히 시란 언어에 대한 엄격한 선택과 배치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를 통해 문학이 확보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미문이나 독특하고 멋진 형식일까?

흔히 예술을 세계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이는 ‘멀어지게 하기’와는 다르다. 멀어지는 것은 본질과 소원해지는 것인 반면, 낯선 것은 기존 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판단 및 구별에 의한 폭력들, 권력들에서 벗어나며 존재 자체와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창작은 ‘나’의 중심성을 지우며 낮은 자리를 자처하는, 침묵하는 작업이기에 ‘고독한 작업’이라 부른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가 “잃어버리는 재능에 가깝다”라고 한 이유다.

하지만 이외수 작가의 ‘단풍’ 속 화자는 낯설게 하기는커녕 단단히 ‘가부장 남성적 자아’를 붙잡고 있다. ‘화냥년’의 유래가 ‘환향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사안의 본질이 아니다. ‘화냥기’는 그 자체 ‘여성이 남자를 밝히는 바람기’라는 뜻의 멸칭이다. 여성에게는 남자에 관심만 가져도, 아니 그냥 웃기만 해도 ‘밝힌다’라는 낙인이 얼마나 유구했는가. ‘화냥년’과 같은 ‘쉬운 여자’, ‘꽃뱀’, ‘팜므파탈’이라는 말들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오독하고, 억압한 일이 얼마나 수두룩했는가. 반면 남성에게는 이에 대응할 만한 말, 인식은 거의 없지 않은가.

‘화냥기’라는 단어 자체를 문학에서 금지하자는 말이 아니다.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쓰일 수 있다. 어떤 언어든, 강간이나 폭력의 묘사든 작품 속에서 쓰이는 맥락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외수 작가는 ‘화냥기’를 단지 ‘화려하지만 금세 져버린 뒤 추위가 오는’ 단풍의 맥락에 은유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피상적이고 혐오적인 인식을 확대·재생산했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의 문학에 만연한 문제였다. 창녀와 처녀의 이분법, 오누이의 강간을 남성 화자의 성장으로 삼는 클리셰 등이 대표적이다. 문학의 이름으로 본질에 때를 묻혀 온 흑역사다.

따라서 류근 시인이 이외수 작가를 옹호한 말, “문학인이 버려야 할 말이 많아진 세상이 참 무섭긴 하네만”은 정확히 그 반대다. 페미니즘의 도래는 오히려 문학인이 버려야 할 말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오히려 그동안 무서운 세상에 산 쪽은 여성들(그리고 일부 남성들)이었다. 골라낼 말이 많다면 더욱 위기의식을 느끼고, 창작의 소임을 다할 일이다.

이번 논란은 지금까지의 문학을 제대로 점검해야 한다는 요구이자, 앞으로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단풍’과 같은 작품들이 계속 호명될 것이다. “난독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예술은 항상 작가와 시대보다 무한했고, 계속됐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세 번째 시집 ‘여수’를 출간한 서효인 시인이 본인의 시 ‘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을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로 바꾸는 등 여성 혐오적인 시어를 고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시 릴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마을들을, 사람들을,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라고 했다. 창작자들은 부디 여성에 대한 관습적인 대상화와 비하의 감정을 걷어내고 여성을, 성 소수자와 장애인, 난민과 같은 약자들을 사람 그 자체로 보아달라. 당신들에게는 우리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게 할 힘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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