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제작진의 낚시에 그대로 넘어가는 것 같아서 확신할 수 없는 단순한 추측으로 앞으로의 내용을 예단하는 포스팅은 자제하는 편입니다만, 제빵왕 김탁구의 결말을 앞둔 15일 방송을 보니 그냥 단순한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결말 알아맞히기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이 드라마가 언제나 한 회를 마무리할 때마다 여러 가지 미끼들을 던져놓기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미끼들에 기꺼이 걸려 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고 맛나 보였거든요. 시청률 40%를 넘은 흔치않은 대박드라마의 30회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결론이니 그 마무리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아요.

솔직히 정신없고 번잡한 29화였습니다. 한껏 긴장감을 고취시켰던 각종 사건들이 갈팡질팡 방황을 반복하며 속절없이 맥없이 풀려버렸어요. 청산공장을 무너뜨리기로 작당했던 공장장과 유통업체 사장님들은 김탁구가 개발한 신제품 우리쌀빵 하나에 눈 녹듯이 얼었던 마음을 풀어버렸고, 어머니와 한실장을 향한 구마준의 독기어린 복수도, 구일중 회장이 진실을 알기 위해 바람개비 형님과 공조했던 함정도 별다른 폭발력도, 반전도 주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듯 시시하게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뭔가 일어날 것처럼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허무하게 끝나버린. 딱 그런 허탈함과 찜찜함으로 가득했던 방송이었어요.

그런 와중에 굳건히 견지해왔던 등장인물들의 성격들 역시 이리저리 움직이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확고한 매력을 뽐내던, 매혹적이던 악녀 서인숙은 폭주하던 악행으로의 질주에서 한발 물러서며 구회장님을 향한 사랑밖에 모르는 평범한 여자로 커밍아웃했습니다. 그 자리를 화장만 바꾸면 악녀가 되는 줄 아는 어설픈 팜므파탈로 변한 신유경이 차지했지만, 너무 급하게 변해버린 그녀는 마치 배경음악에 맞춰 인셉션을 찍고 있다는 듯, 이게 모두 꿈인 것처럼 빨리 변신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에 바쁩니다. 구마준의 위태위태하던 독기도 김탁구와의 눈물의 화해와 함께 풀려버렸구요. 결말을 앞둔 드라마 속 사람들이 모두 개과천선이나 합당한 대가를 치른다지만 이렇게도 순식간에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연장 방송에 반대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급하게 마무리 지을 양이었다면 그냥 천천히 납득시킬 수 있는 결과를 향해 갈 수 있도록 2회 정도는 더 끌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나마 끝까지 독하게 자기 정체성과 개성을 잊지 않은 사람은 한실장님 밖에는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29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한실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모질게 악역을 담당해오면서 이 드라마에 깊이를 책임져준 그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담뿍 담겨진 내용이었죠. 모두가 김탁구의 선한 성인군자 에너지에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서도 홀로 그 반대편에 서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사람은 한실장 뿐이에요. 이젠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서인숙에게 던진 너무나 슬픈 순애보의 프러포즈는 어쩌면 이 멋진 악역을 훌륭히 소화해준 배우, 전인화와 정성모를 위한 한풀이 무대였습니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가장 불쌍한 피해자는 이 두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폭풍우처럼 흘러간 내용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니 묘한 의구심, 혹은 불안함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기어오르더군요. 아무래도 주인공 김탁구가 마지막엔 죽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게도 버림받고, 회사에서도 축출당할 위기에 처한 한실장의 마지막 발악은 결국 김탁구를 납치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구일중 회장과의 흥정 이전에 같이 파멸의 길로 가겠다는 단발마 같은 것이었거든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깨어난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밝게 웃기만 하는 김탁구의 얼굴과 교차되는 주요 인물들의 표정에서도 그의 어두운 운명을 짐작하게 하구요.

게다가 지금 이 드라마의 흐름에서 김탁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성 그룹의 후계자로 남기에는 구마준과 큰누나 구자경, 특히나 거성의 안주인 노릇을 하려는 신유경과의 관계가 너무나 애매하죠. 제일 좋은 것은 팔봉빵집으로 돌아가 양미순과 같이 소박하게 빵쟁이로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훌훌 털어버리기엔 팔봉빵집의 사람들도 거성그룹에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습니다. 구마준과의 화해의 자리에서 살아있으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한 때라,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김탁구의 말에서도 왠지 모를 죽음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구요. 빵쟁이의 길은 구마준이, 거성 그룹은 구자경이 맡을 수 있는 상황에서 김탁구의 역할은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모두를 구원하고 변화시켰던 전설의 인물로 사라지는 것이 제일 적당해 보여요.

그러니 이 드라마의 결말이 김탁구의 죽음과 그를 기리는 이들이 이 성인군자 빵쟁이의 유지를 이어나간다는 비극 아닌 비극, 해피앤딩 아닌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 난데없고 서글프기는 하지만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일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이 드라마는 만듦새가 엉성하고 구석구석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끝까지 내용을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긴장감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편성운이 좋고 시운에 맞았다고 해도 시청률 40%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니까요. 이렇게 마지막까지 그 결말이 궁금하고 반전이 기대되는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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