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스리랑카 노동자가 풀려났다. 경찰은 두 번이나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되어 체포 후 48시간을 넘길 수 없는 법적 규정 때문에 풀어줄 수밖에는 없었다. 경찰은 부득이 스리랑카 노동자를 불구속 수사를 하겠다면서 저유소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를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43억 원의 피해를 남긴 저유소 화재의 원인이 300원짜리 풍등 하나였다는 경찰의 수사는 너무도 성급했다.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중실화로 원인을 몰아가려 한 것은 성급함을 넘어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작동한 것도 의심하게 된다. 검찰의 영장기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며, 경찰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10일 오후 경기 일산동부경찰서에서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 피의자 A(27·스리랑카)씨가 유치장에서 풀려나고 있다.이날 검찰은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A씨는 긴급체포된 지 48시간 만에 풀려났다. Ⓒ연합뉴스

무엇보다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중실화 혐의를 씌운 것은 너무 과했다는 전문가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실수이고, 저유소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일단 화재의 원인이 된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일단 풍등을 날린 행위는 개정된 소방기본법에 의해 불법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중실화죄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법조계의 시각이다.

시민들이 보는 저유소 화재의 진짜 의문은 스리랑카 노동자의 실수가 아니라 저유소 주변으로 떨어진 풍등에 의해서 잔디에 불이 붙었고, 18분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또한 잔디밭에 붙은 불씨가 저유소로 옮겨갈 정도로 무방비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심지어 화재 넉 달 전인 지난 6월에 실시한 자체 안전점검에서 모두 ‘이상없음’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더 기가 막혔다. 문제는 안전점검의 방식이 대부분 육안검사였다는 것이다. 점검항목 122개 중에 99개가 육안검사로 끝낸 것이다. 외부의 불씨가 송유관으로 그렇게 쉽게 타고 들어가 대형화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안점불감증의 확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경찰 관계자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고 있다.전날 경찰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해 중실화 혐의로 스리랑카인 A(27)씨를 긴급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송유관 공사의 태만과 부주의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방어권이 빈약한 외국인 노동자를 긴급체포한 경찰에게 인종차별의 의심마저 품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시선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이번 사건에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동정여론이 컸던 것은 그만큼 경찰의 수사가 공감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찰이 외국인 노동자 한 명에게 혐의를 몰아 수사를 너무 쉽게 하려고 했다는 비판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는 야만이다. 외국인 혐오의 대표적 사건은 일본의 관동대학살이다.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 발생한 대지진 때 일본 내각은 조선인들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를 조장했고, 일본인들은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자경단들이 날뛰게 됐다. 일본의 야만이 이것뿐만은 아니지만 관동대학살이 남긴 역사의 교훈은 인종차별과 혐오에 대한 경계이다.

이번 저유소 화재를 다룬 경찰의 태도에서 관동대지진을 떠올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제노포비아 같은 혐오는 아주 작은 현상도 과시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시민들은 야만을 스스로 차단하고 경계할 집단지성의 수준을 갖추고 있음을 이번 저유소 사건을 통해 새삼 증명되었다. 43억 원의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우리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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