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런은 어릴 적 바닷가에서 말을 탄 기수와 조우한다. 보통의 어린이라면 자신보다 몇 십 배 커다란 동물인 말을 타고 있는 낯선 이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려는 반응이 정상이다. 하나 알런은 그와 그가 타고 있는 말이라는 동물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알런은 기수의 도움을 받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타는 행운을 누린다. 실수로 말에서 떨어진 알런을 발견한 알런의 부모는, 부모의 동의도 없이 어린 아이에게 말을 태운 기수를 비난한다.

하지만 어린 알런은 난생 처음 말을 탄 경험을, 낙마한 공포의 추억으로 몸서리치기보다는 무언가 모를 경외와 황홀감을 선사한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각인한다. 이후 알런에게 있어 말은 동물 그 이상을 넘어서서 초월적 존재, 경외의 대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연극 <에쿠우스> 공연사진 (사진제공=극단 실험극장)

한 아이가 성숙한 어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극복해야 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어야 한다. 그 방식은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처럼 실제로 아버지를 물리적으로 살해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아내 몰래 성인영화를 보는 알런의 아버지는 알런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알런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의 법’으로 작용하는 말에 대한 신격화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기수를 통해 난생 처음 말을 탄 다음부터 성립된 말에 대한 신격화를 넘어서야 비로소 알런은 아버지의 법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알런에게 작용하는 아버지의 법, 말의 신격화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법은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알런의 첫 이성교제 상대인 질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위와 질서를 부여한다.

연극 <에쿠우스> 공연사진 (사진제공=극단 실험극장)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기제가 알런의 아버지와 질이라는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실체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알런에게 있어 말의 신격화는 ‘아버지의 법’으로 작용하게 된다.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 유전자의 종(servant)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할 정도로 인간에게 있어 종족 보존의 욕구는 강력하다. 한 예를 들면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이 자유를 만끽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한 남녀가 서로 살을 섞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중인 알런에게 있어 질의 마구간에서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운 기회였다. 그럼에도 말의 신격화라는 아버지의 법은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질과의 잠자리조차 망칠 정도였다. 알런에게 있어 아버지의 법은 생물학적인 욕구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연극 <에쿠우스> 공연사진 (사진제공=극단 실험극장)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이뤄진다면 물리적인 위해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법을 넘어서야 맞다. 하지만 알런은 그렇지 못했다.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말의 눈을 찌르는 가운데서 말의 신격화라는 아버지의 법을 극복하기를 바랐다.

그 옛날 그리스의 오이디푸스가 실제로 눈을 찔렀던 것처럼, 20세기 영국에서는 알런이 실제로 말의 눈을 찌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버지의 법을 넘어서고자 노력했다.

연극 에쿠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아버지의 법’으로 작용하는 말의 신격화를 극복하기 위해 알런이라는 소년이 실제로 말의 눈을 찌르는 물리적인 희생을 치르는 서사로 읽을 가치가 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법이라는 알런의 ‘판타즘’이 실존하는 생물학적 존재인 말의 눈을 찌름으로 아버지의 법을 극복하기를 바란 가련한 서사가 에쿠우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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