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김지은 씨가 기고글을 통해 "노동자이고 싶다"는 심경을 밝혔다. 김 씨는 "저는 더 이상 노동자 김지은이 아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입도 벌지 못한다"며 "고소 이후 반년 넘게 재판에만 임하고 있다. 재판 중에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가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좋은 근거로 사용됐다. 피해자답지 않게 열심히 일을 해왔다는 이유였다"고 토로했다.

19일 발행된 민주노총 추석선전물에는 안희정 전 지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소송 중에 있는 김지은 씨의 기고글이 실렸다. 김 씨가 기고를 통해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일 발행된 민주노총 추석선전물에는 안희정 전 지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소송 중에 있는 김지은 씨의 기고글이 실렸다.

앞서 지난달 14일 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 대해 1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유력 정치인이라는 점을 들어 위력의 존재 자체는 인정했지만 "위력으로 존재감을 과시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당시 재판부는 김 씨가 최초 간음 상황 이후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 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당일 함께 와인바에 간 점, 지인과의 상시적인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안 전 지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점 등을 들어 "단지 간음피해를 잊고 수행비서의 일로써 피고인을 열심히 수행하려 한 것뿐이라는 피해자 주장에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에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해당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위력에 대한 판단을 좁게 해석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김 씨는 기고글에서 "저는 더 이상 노동자 김지은이 아니다"라며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고소 이후 반년 넘게 재판에만 임하고 있다. 재판 중에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가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좋은 근거로 사용됐다. 피해자답지 않게 열심히 일을 해왔다는 이유였다"고 1심 재판부를 비판했다.

김 씨는 자신이 유력 정치인의 수행비서로서 성폭행 피해를 입고도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기고글에 따르면 김 씨는 10개월 단기간 행정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평가를 통해 일부 근무기간을 재연장하는 방식의 근로계약 형태였고, 김 씨는 계약연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후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으나 계약 기간이 만료된 뒤 김 씨는 안 전 지사의 대선 캠프에 들어갔다. 김 씨는 선배들로부터 후보의 말에 대들지 말고 심기를 잘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이야기들에 대해 김 씨는 "정치권에 온 이상 한번 눈 밖에 나면 다시는 어느 직장도 쉽게 잡지 못한다는 말도 늘 함께였다"며 "이력서보다 선배들의 추천과 험담이 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권 특유의 '평판조회'였다"고 말했다.

대선 이후 김 씨는 별정직 공무원으로서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를 맡게 됐다. 이 당시에 대해 김 씨는 "도청에 들어와 가장 힘들었던 건 안희정 지사의 이중성이었다"며 "안희정의 수행비서는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휴일은 대부분 보장 받지 못했다. 메시지에 답이 잠깐이라도 늦으면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고, 24시간 자신의 전화 착신, 아들과의 요트 강습 예약, 개인 기호품 구매, 안희정 부부가 음주했을 때 개인 차량 대리운전 등 일반 노동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주어졌다"고 토로했다.

이어 김 씨는 "점차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건 내 평판만 깎아 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이야기했다. 지사 험담을 하면 혹여나 일에서 잘릴까 주변에 좋은 이야기들만 했다"며 "그러다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성폭력 피해를 당했고, 다음 날 지사가 바로 사과 하는 것을 듣고 잊으려 했다. 아니 잊어야만 했다. 여러 차례 피해가 이어졌지만 더 주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 씨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 일을 하기까지 계약직·별정직 공무원을 거치며 느꼈던 일종의 고용불안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1심 재판부를 비판했다. 김 씨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뿐만이 아니"라며 "침묵과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 달갑지 않은 농담을 듣는 것, 회식자리에서의 추행도 노동자들이 겪는 위력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수년간의 제 노력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인생으로 평가 받았다"며 "피해자다운 것이 업무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사는 것인가. 하루하루의 업무가 절실했던 제가 당장 관두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하고 싶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동료들과 일하고 싶다"며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다"고 호소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