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들이 다시 뉴스의 전면에 등장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16일 직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포함된 방북단 명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들의 방북 가능성은 이미 예고된 바 있는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방북단 명단에 포함되는지가 관심사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나서야 다른 재벌 그룹 총수들이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나설지 윤부근 대외담당 부회장이 역할을 대신할지 결정한 바 없다는 답변을 해왔는데, 결국 결단을 내린 셈이다.

보수언론은 내심 불편한 재계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다. 미국이 대북제재 전선 유지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대기업 총수가 함부로 방북을 하는 것은 부담이라는 논리다. 더군다나 재벌 총수들이 방북에 동행하더라도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남북경협 등과 관련한 대북사업 구상을 구체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결국 ‘생색내기’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정권이 추진하는 역점사업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으니 대기업은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 됐다는 게 보수언론들의 주장이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제재와 관련한 행보를 부쩍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이 공해상에서 선적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유류를 밀수하는 현장을 추가로 폭로하는 ‘망신주기’ 전략을 언급하는가 하면, 러시아가 대북제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 보고서 내용을 수정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대북제재 우회 문제를 다룰 유엔 안보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중에 이뤄질 예정이라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균열을 우려하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먼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스캔들 문제와 최근 출판된 밥 우드워드의 백악관 비사 관련 저서 때문에 지지율 하락에 비상이 걸려있는 상태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캠프 핵심 인사들이 러시아 스캔들 문제로 줄줄이 재판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11월 중간선거 결과가 참패로 끝나면 그 다음 수순은 ‘트럼프 탄핵’ 국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이 탄핵 당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지지층의 단결을 호소한 바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특히 러시아의 대북 제재 무력화 시도를 강조하는 이유 중 일부는 이런 조건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미국 내 일부 언론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지지층 일부가 이탈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미국이 관세 부과를 강행하면서도 최근 중국에 무역 협상 재개를 요구한 것은 이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미중무역전쟁이 단기적 필요에 의해 돌발변수로 현실화 된 측면이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구조적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이 산업구조고도화로 국제적 분업체계 내에서 ‘세계의 공장’ 역할을 고수할 수 없게 되면서 기술쟁탈전이 불가피한 구조가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파국을 피해가려는 나름의 노력을 하겠지만 갈등 자체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러시아 스캔들이 대북제재와 연결됐듯, 중국과의 무역 분쟁도 북한 압박을 위한 소재로 활용되는 것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언급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했듯 그렇다고 ‘판’을 완전히 깰 수는 없는 게 또 트럼프 대통령의 처지이다. 즉, 트럼프 행정부의 최근 대북제재 관련 행보는 북미대화가 적정한 수준에서의 타협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북한이 굴복하는 그림을 만들어야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한 걸로 볼 수 있다.

이 조건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거스르기보다는 이용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어떻게든 북한이 비핵화 관련 중대 결심을 강행하는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제재 관련 움직임으로 ‘채찍’을 꺼내 들면서 대기업 총수들을 방북일정에 참여토록 하는 ‘당근’을 제시하는 모양새를 연출할 필요가 있다. 이 구도 자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나쁠 게 없기 때문에 대북제재 위반 논란 등으로 한미간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6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남북정상회담 공식 수행원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이재용 부회장 관련 문제제기가 반대쪽에서도 나온다는 점 역시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방북에 동행하도록 한 것은 결국 ‘정치적 면죄부’를 준 거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재판은 재판이고 일은 일”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발언이 원론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이 정권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관련한 논란이 이것뿐이었다면 임종석 비서실장의 입장 표명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에서 이재용 부회장을 따로 만난 이후 이재용 부회장이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만나는 자리에 보란 듯이 삼성바이오로직스-바이오에피스 문제 관련 인물들 대동하고 나타나는 판국이다. 최근의 ‘고용쇼크’ 논란과 삼성의 180조원 투자 계획을 같이 보면 이 정부가 점점 더 대기업에 의존적이 돼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겨레는 16일 국회 정무위 여야 간사가 재벌의 은행 소유를 금지하는 규정을 법 조항이 아닌 시행령에 맡기는 내용의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제정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KT와 카카오가 이익을 볼 수 있게 됐는데, 먼 훗날이라도 재벌의 은행 소유가 한층 더 쉬워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게 한겨레의 주장이다.

청와대의 “재판은 재판이고 일은 일”이라는 말이 순수한 본래 의미로 전달되려면 지금까지의 이런 일이 없었어야 한다. 그러나 집권 세력은 앞에서 봤듯 재벌에게 손을 벌리는 선택지만 남는 정치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평양에 가느냐 마느냐는 오히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정권이 대기업 재벌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실제로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의지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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