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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김석의 미디어 책읽기(1)] 그레그 팔라스트, 평민사 2004
김석 KBS기자 | 승인 2008.01.07 07:31

토마스 쿠퍼. 죄를 지은 인간쓰레기, 나쁜 사람, 중죄인. 범죄일자 2007년 1월 30일. 미국의 43대 대통령 선거 날짜는 2000년 11월 7일. 6년 뒤에 자신이 저지를(?) 미래의 범죄로 인해, 쿠퍼는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토마스 존슨 목사. 10년 전 뉴욕 거리에서 코카인 판매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함.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플로리다로 이주. 플로리다 주 법원은 다른 주에서 이주해온 중죄인의 시민권은 유지해야 한다고 이미 두 차례 판결. 존슨 목사가 10년 전 전과 사실을 시인하자, 주 선거 담당 공무원들은 존슨 목사의 선거인 명부 등록을 거부했다. 자니 잭슨 2세. 32살. 전과 기록 없음. 텍사스에서 죄를 지은 존 피츠제럴드 잭슨과 이름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플로리다 주 중죄인 명부에 오름. 자니 잭슨 2세는 텍사스에 가 본 적도, 피츠제럴드라는 미들 네임을 사용한 적도 없었음. 텍사스의 존 피츠제럴드 잭슨은 텍사스를 떠난 적도, 감옥에서 출소한 기록도 없음. 텍사스의 중죄인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니 잭슨 2세는 선거인 명부에서 제외됐다.

“2000년 11월, 미 플로리다는 무고한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 부시와 고어.  
 
2000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플로리다 주에서 벌어진 일이다. 얼마나 많은 예가 더 필요한 것일까. 대선을 몇 개월 앞두고 플로리다 주지사 제브 부시(현 부시 대통령의 동생)와 플로리다 주 국무장관 캐서린 해리스는 각 지역 선거담당관들에게 중죄인 5만 7천7백 명의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문제의 ‘삭제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된 사람들의 90%는 아무 죄가 없었다. 이 가운데 54%가 흑인과 히스패닉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5만 명이 넘는 죄 없는 사람들의 절반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당은 최소한 2만 2천표를 잃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와 고어의 득표 차는 불과 5백37표.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제브 부시는 중죄인이긴 해도 엄연히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 4만 명을 선거인 명부에서 제외하라고 지시했다. ‘삭제 리스트’의 5만 7천7백 명과는 별도로 이들 4만 명 역시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플로리다는 무고한 사람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피부가 검으면 검을수록 좋았다.”

이 오류투성이의 ‘삭제 리스트’는 데이터베이스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의 사기업에서 나온 것이었다. 플로리다 주는 대선 유권자 명단 확인 작업 대행사로 데이터베이스 테크놀로지라는 민간업체를 선정하고 2백30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명단 확인 작업은 이루어졌을까? 플로리다 주 레온 카운티가 중죄인으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는 6백94명을 일일이 재조사했다. 그랬더니 중죄인은 고작 34명뿐이었다. 95%가 오류였다. 그렇다면 통계학적으로 플로리다 주 중죄인 명단이 가진 오류의 확률은?

2001년 2월, 그레그 팔라스트는 BBC 촬영팀과 함께 제브 부시의 선거담당관을 인터뷰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날아갔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내가 비밀문건을 그 앞에 내놓자, 제브 부시의 부하직원인 선거 담당관은 마이크를 급히 떼어놓더니 45미터를 전력 진주하여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카메라를 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 그레그 팔라스트.  
 
저자는 이런 삭제 게임의 실체는 ‘음모’가 아니라 ‘기회주의’라고 말한다. “기회주의는 계획과 음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은폐가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도둑질한 이 사건의 결과는? 엉뚱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 거다! 선거가 자고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신성한(?) 절차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19세기도 20세기도 아닌 21세기에 그것도 민주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초강대국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이 도둑맞은 선거 이야기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일이 썩어가는 것을 지켜볼 전문가도 없고, 자존심이 강한 기술자도 없고, 일을 폭로할 사람도 없다.” 오죽했으면 저자는 결론에 이런 말을 덧붙여 놓는다. “만약 미국의 선거 절취 문제가 투표기계나 투표절차를 바꾸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작년 러시아 의회가 제시한 방법대로 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계정세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이 더욱 커져가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미 대통령 선거는 아이티와 르완다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도둑 맞은 선거’를 보도한 곳은 BBC와 가디언 뿐이었다

   
  ▲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린 이 사건을 보도한 미국 주류 언론의 태도를 저자는 딱 한 마디로 요약한다. “양들의 침묵”이라고. 그렇다면 이 스캔들을 보도한 언론은 어디였을까? BBC와 <가디언>이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바로 그 BBC와 <가디언>뿐이었다. 정부와 기업의 홍보담당자들이 던져주는 보도 자료와 공식 설명에 놀랍도록 익숙해져버린 언론의 침묵, 특히 주류 언론의 침묵은 이렇게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거꾸로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저자가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한 우리 언론들의 보도태도를 보았다면, 경찰과 검찰이 힘들여 붙잡고 법원이 유죄를 판결한 ‘유전무죄’의 장본인들이 명절이나 연말연시에 국가의 수장께서 내려주시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이유 불문하고 ‘대사면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친절하게도 저자는 서문에 실마리를 던져주고 계시다. “그때 나는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기업가에 대한 정치가의 사랑만큼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을.”

이 모두가 추측에 근거한 허튼 소리가 아니다. 저자의 주장은 이 책에 예시돼 있는 수많은 공식 문서가 입증하고 있다. ‘문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대한 탐사기자들은 일찍이 문서 확보의 중요성을 유달리 강조했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오직 나는 문서만을 보여줄 것이다. 대부분 ‘기밀’이라든가 ‘공개금지’ 등의 글자가 박혀 있다.”고 했다.

퓰리처상 수상자이며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경제부의 탐사보도 기자인 마이클 힐트직(Michael Hiltzik)도 기자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문서를 입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밝힐 수 없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문제는 밝혀진 ‘진실’조차도 외면을 받는 ‘현실’일 것이다. 몇몇 지식인이나 언론인의 서고 한 쪽에서 빛나고 있을 이 ‘저주받은 걸작’의 가치는 백 번 천 번 강조해도 모자랄 듯하다. 저자도, 이 책을 읽은 나도,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조국 미국의 명문 부시 가문이 그렇듯, 우리의 정치인들과 기업가들 역시 “돈 주고 살 수 있는 민주주의 가운데서 최고의 민주주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김석 KBS기자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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