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이 가시화되는 모양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르면 다음 주 쯤 3~5개 부처 장관 교체가 예상된다고 한다. 국방부, 교육부, 환경부, 여성가족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애초 청와대의 카드였던 ‘협치 내각’은 물 건너 가는 분위기다. 청와대가 23일 협치 내각이 아직 유효한지 묻는 질문에 “큰 흐름으로 봐서 지금은 어려워진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협치 내각은 야당이 각자 처한 상황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애초에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더라도 청와대가 어떤 그림을 그리며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갖고 일을 추진했는지는 의문이다.

‘협치’라고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어떤 그림인가가 중요하다. ‘협치’의 필요성은 실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소야대 상황을 벗어나는 것에서 나온다. 국회에서 범여권이 다수파를 형성해 입법적 뒷받침을 해야 정부가 이루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여기서 ‘이루고 싶은 일’이 과연 무엇이냐는 거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예를 들어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 등이 주장하는 ‘개혁입법연대’는 이후의 정계개편까지 염두에 둔 것이지만 어쨌든 ‘개혁입법’이라는 공통분모를 전제한다. 그런데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단일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됐다.

첫째는 민주평화당 대표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된 영향이다. 정동영 대표는 ‘개혁입법’의 첫 번째 과제로 선거제도개혁을 내세우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제도개혁에 적극적인 입장이지만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선거제도개혁의 특성상 대통령의 뜻을 여당이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여당 대표로 출마한 인물들은 선거제도개혁에 동의한다면서도 이런 저런 전제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여의도 호사가들은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의 관전포인트 중 하나를 당청관계의 변화로 본다. 추미애 대표 체제가 대통령의 유례없는 고공지지율 속에서 당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유지해야 했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표는 역할을 달리 해 수평적 당청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소화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책임대표론’이나 ‘대권주자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무리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대통령이라 해도 결국 지지율은 빠지기 마련이다. 현역 의원들 입장에선 총선을 앞둔 시점까지 공천권을 사수할 조건을 만드는 게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선거제도개혁 논의에 힘이 실릴 수 있을까?

둘째는 정부 여당 입장에서 ‘개혁입법연대’라는 조건 자체가 부담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개혁’이라는 것은 현재의 법제도를 더 나은 쪽으로 바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 여당은 애초에 천명한 ‘개혁’의 노선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분위기가 선명하다.

통계청의 7월 고용동향 발표로 인해 불거진 ‘고용참사’ 논란에 이어 올해 2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놓고 또다시 비슷한 논쟁이 오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애초 보수언론 등은 고용참사론을 이슈화하면서 23일 가계동향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경향 등이 확인될 경우 소득주도성장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산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23일 공개된 조사 결과는 많은 사람이 예상했듯 소득분배 악화가 개선되는 기미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물론 세부 내용에서는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표본 구성 등이 다르기 때문에 지난해 동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와의 직접적 비교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신중하다기 보다는 성급하다. 그러나 앞서의 고용동향 발표 등과 종합하면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소득격차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에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해 온 전문가들도 최저임금 인상의 부정적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기존의 성장론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상황에선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는 청와대와 정부로서는 답답한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그러니 관료 집단이 갖고 있는 익숙한 해법에 눈이 간다. 청와대와 여당의 정책적 우클릭이나 김동연-장하성 갈등론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최근 불거진 국회 환노위에서의 논란도 이의 연장선이다. 정의당은 국회 환노위 고용노동소위 정원을 축소한 것 자체가 이정미 대표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20대 전반기 국회에서 정의당을 특별히 배려했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라는 ‘협상 파트너’가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정의당 배려를 고집할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소위 정원을 8명을 9명으로 늘리는 대안도 논의됐지만 정의당이 ‘범여권’으로 인식되는 상태에선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4대 5 구도는 여야 동수가 아닌 사실상 여당 우위 아니냐는 항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개혁입법이라는 과제에서 정부 여당의 ‘후퇴’가 불가피하다면 애초에 여당이 정의당을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원내지도부가 규제샌드박스 5법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상황을 보면 그렇다. 정의당은 정부 여당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규제완화에 대해 재벌 대기업의 독과점을 심화시키고 특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 논란에서 보았듯,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정의당은 오히려 정부 여당의 협치 대상이 아니라 걸림돌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 정의당은 개혁입법연대가 아니라 규제완화연대를 하려는 것 아니냐며 공세를 펴고 있다.

이런 판국에 협치를 누구랑 해야 할까? 애초에 청와대가 ‘협치 내각’을 언급하고 제안한 의도가 새삼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바뀌었더라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 여당의 우클릭은 지방선거 이전부터 사실 예고된 상태였다. 그러니 둘 중의 하나이다. ‘박선숙 장관론’에서 보듯 처음부터 정계개편 논의를 추동하는 불쏘시개용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한 치 앞으로 내다보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 상태거나.

둘 중 어느 경우를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난국이 청와대의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의 요구는 규제완화 정도가 아니라 정권이 백기를 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기성의 해법 밖에 모르는 관료 집단에 끌려가는 상황도 계속될 것이다. 개혁적 요구를 내세우는 세력과는 불편한 관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악순환이다.

이게 애초 정권의 밑그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난국에서 탈출하려면 이윤주도성장을 소득주도성장으로 뒤집은 것처럼 악순환의 순서를 거꾸로 되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현실적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개각의 내용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꺼진 불씨를 다시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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