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회의는 2020년 대입제도 개편 문제를 '공론화'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장에 전 김영란 대법관을 위촉했다. 이에 절차에 따라 공론화 과정을 거쳐 8월 3일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 결과를 발표하고, 7일 특위의 교육제도 개편 권고안을 결정했다. 네 달여의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과정, 이 과정은 무엇을 남겼을까? 8월 16일 <다큐 시선>이 이 '공론화'에 대해 알아본다.

평범한 시민들의 숙의를 통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충북 제천에 사는 귀농 12년차 김은중(67) 씨는 옥수수를 모두 따서 팔 것과 보관해 놓을 것을 분류하는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여름날 하루가 한 달 같은 농부의 시간, 하지만 김은중 씨는 그 소중한 시간 중 2박3일을 대학입시 개편 숙의 토론을 위해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EBS <다큐 시선> ‘공론화를 아십니까’ 편

어느 날 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이미 자식들의 교육을 다 시킨 나이지만 국가 백년대계 교육의 공론화 과정에 기꺼이 참여를 결정했다. 전화가 걸려올 당시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만학의 간호학도 김원희 씨(26)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모두 전화 상담원에게 자신들처럼 교육에 무관심한 일반 시민도 그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19세 이상 성, 연령, 지역 등 마치 우리 전 국민의 분포도를 축약해 놓은 듯한 2000명이 1차 설문을 통해 뽑혔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입 전형에 대한 태도나 책임감 등을 인터뷰하여 최종 400여 명이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국에서 뽑힌 우리 국민의 표본 집단을 통해 하고자 하는 ‘공론화’란 무엇일까? 전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위원장은 이런 일반인들의 교육 공론화 과정을 ‘재판’에 빗댄다. 기업 소송, 하지만 판사는 기업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양쪽의 의견을 잘 들어보고, 그와 관련된 자료와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취합한 판사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듯, 김영란 판사는 공론화 과정에 모인 일반인들에게 '교육대계의 판사’가 되어보심이 어떻겠느냐 권한다.

공론화란?

이 일반인들이 모여 하는 공론화는 무엇일까? 지난 촛불혁명 과정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그간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명했다. 또한 촛불을 들며 국민이 직접 행동하고 바꿔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에 따라 정책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에 대한 긍정적 모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시작은 신고리 5.6호기 재가동 문제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 결정을 내린 공론화 과정이다.

'공론화'는 말 그대로 함께 모여 의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 해법'을 모색해 내는 것이다. 이른바 관심 있는 이들끼리 모여 하는 공청회와 다르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전화 여론조사'와도 다르다. 국가 교육 특위에서 전문가와 각계각층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4가지 공론화 의제를 선정하는 것으로 대학입시제도 개편 공론화의 여정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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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제들에 대해 각 지역별 국민 대토론회를 통해 알리고, 미래 세대 토론회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또한 TV 토론회는 보다 광범위한 국민들의 이해를 도모한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민들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의 1, 2차 ‘숙의’ 과정을 거친다.

김원중, 김원희 씨는 공론화위원에 선정된 후 보다 내실 있는 토론과 결정을 위해 마치 수험생처럼 보내준 자료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공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E러닝의 진도가 꼼꼼히 체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체크 때문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중요한 교육 정책에 대한 책임이 공론화 의원들을 '가열 찬 학습'에 매진토록 한다. 그저 공부만이 아니다. 신문기사도 보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떤 것이 있는가 찾아보기도 한다. 박경희 씨(54)는 입시 교육을 거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자녀들과의 대화가 늘었다.

그렇게 비록 짧은 2주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공론화의 의제들을 숙지한 전국의 위원들이 한곳에 모인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공론화 숙의 과정. 시민들은 먹고 자는 시간 외에 토론, 또 토론을 하며 숙의하고 중지를 모은다. 평등하게 모인 이들은 그 누구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비독재성), 숙의 과정을 거듭한다.

그렇게 4개월여의 장정, 드디어 8월 3일 공론화 숙의 과정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제시된 의제 1과 2가 각각 1,2위로 결과가 나타났고, 양자 간에 통계적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할 만큼 절대 다수가 지지한 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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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위주 전형 45% 선발이라는 결과에 대해 대학들은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반면, 여론은 엇갈렸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내놓은 '절대평가 공약이 후퇴했다'는 반발이 이는 반면, 시민이 참여한 직접 민주주의 과정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평가가 엇물렸다. 200억을 들인 개편안이라지만 결국 또 문제풀이 수업의 되풀이라는 보잘 것 없었다는 의견과 시민성과 전문성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의견이 대립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보다, 애초 국민들 의견과 상관없이 런치세트 고르듯 사지선다 4가지 개편안을 제시한 것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즉, 어떤 걸 공론화에 붙일지에 대한 사전 공감대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과연, 대입제도 개편이 ‘공론화’라는 과정에 적합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마치 서울시가 미세먼지 문제와 관련하여 3000명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미세먼지가 심한 기간에 대중교통 무료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지만 차가운 여론에 시달렸던 선례에 빗대어졌다.

그렇다면 뾰족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대입제도 개편에 대한 공론화 과정은 실패한 것일까? 이미 서구에서는 몇십년, 혹은 몇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자리 잡은 직접 민주주의 과정을 우리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 사회에 '정치적 문화'로서는 생소한 공론화에 대한 보다 너그러운 이해가 있어야, 아직 설은 이 제도의 정착을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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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술에 배부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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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곳곳에서 이런 '공론화'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적 과정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자리 잡은 병원. 오래되고 열악했으며 거기로 뛰쳐나오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했던 이 병원은 동네 주민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전이 요구되던 상황. 지역 주민들은 섣부른 결정 대신 2009년부터 1년여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이 낡고 오래된 병원을 재건축하여 지역의 랜드마크로 거듭나도록 했다. 끊임없이 회의를 거듭하고, 연구하고, 내 주장과 함께 타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던 '20여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365일의 여정'은 이제 병원 내의 역사적 기록으로, 그리고 주민의 자부심으로 남겨졌다.

성동구에 있는 도선 고등학교의 학생자치 실험은 이제 타 학교의 탐방 대상이 될 정도다. 교표, 교복은 물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가사를 짓고 직접 녹음까지 한 교가까지 교내 학생들의 많은 활동들이 학생들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심사숙고하고, 공론화 과정을 통하여 조금 느리더라도 맞춰가며 합의점을 찾아내는 이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교육이라 학교는 자랑한다.

유럽식의 참여적 의사 결정 방법에는 시나리오 워크숍, 합의 회의, 시민 배심원제, 공론 조사, 시민회의, 원탁회의 등 다양한 숙의 민주주의적 방식이 있다. 그중에서 이제 우리는 '공론화'라는 과정을 경험했을 뿐이다. 공론화의 결과가 아쉽다지만, 막상 전국 토론회에서 그토록 저마다 전문가라 자부하던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물론 전국 토론회 과정 자체가 학생, 학부모 당사자들의 참여 접근성에 대한 배려도 낮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의 학습을 거쳐 공론화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교육 무관심자'에서 적극적인 주체자로 거듭났다. 결과를 차치한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개개인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성공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성과는 없다. 이제 첫 걸음을 뗀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서의 공론화. 그 무용론을 주장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과정과 제도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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