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여성상을 구현하기 위해 활용된 여고 동창생 서사

고교 동창생인 여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우리 드라마에서는 낯설지 않은 소재다. 예전 어머니 세대에서 '여고 동창회'는 살림살이가 기반이 잡혀 다이아반지도 끼고 악어 핸드백도 들 수 있을 때쯤 나가는 곳이다. 거기는 ‘내가 이제는 이렇게 좀 살만하다’며 살아온 역사에 대해 자존감을 보상받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나 교복이라는 똑같은 유니폼에 공산품 찍어내는 듯한 획일적인 교육을 받던 그 시절, 교실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취급받던 학우들의 후일담은 드라마틱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서사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익숙한 소재'이다.

적인가?

JTBC 드라마 <미스티>

얼마 전 종영한 JTBC의 <미스티>는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적나라하게 다룬 드라마였다. 극중 주인공인 고혜란(서은주 분)의 삶에 불현듯 등장한 여고 동창생 서은주(전혜진 분)는 그때도 지금도 고혜란의 발목을 잡는다. 아니, 그건 고혜란의 입장에서다. 그때도 지금도 서은주에게 고혜란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낚아채 가버리는 '연적'일 뿐이다. 드라마는 고등학교 시절 하명우(임태경 분)를 두고 갈등관계였던 두 사람을, 십여 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한 남자 이재영(고준 분)을 사이에 두고 조우시켜 갈등을 극대화시킨다.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 동창생을 시간이 흘러 '연적'의 관계로 증폭시키는 경우는 빈번했다. 2007년 방영된 김수현 작가의 치명적인 멜로 <내 남자의 여자(2007)>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 두 여성을 등장시킨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이화영(김희애 분)은 미국에서 이혼을 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창생인 김지수(배종옥 분)에게 의지한다. 그러다 친구의 남편을 유혹하게 된다는 이 서사야말로 우리 사회에 고정 관념으로 자리 잡은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같은 해 방영된 <강남엄마 따라잡기>에선 아이의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한 여고 동창생 현민주(하희라 분), 윤수미(임성민 분), 이미경(정선경 분)이 아이들을 내세워 '대리전'을 치열하게 벌인다. 이렇게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갈등에서 '관건'이 되는 건 그때는 별 볼 일 없던, 혹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아이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니 나보다 '잘나가고 있더라'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이다. 2012년 방영된 <청담동 앨리스>에서 고등학교 시절 얼굴은 예뻤지만 능력은 없던 서윤주(소이현 분)가 청담동 며느리가 되어 '갑질'을 하자, 이에 당하던 한세경(문근영 분)이 자신도 청담동에 입성하기 위해 '시계 토끼'를 잡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이들 드라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만큼 우리 사회 속 '여여 갈등'의 전형으로 여고 동창생의 관계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지인가!

중년 여성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의 관계가 '갈등'의 기폭제로 쓰이는 것과 달리, 그 이후 세대들이 주축이 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들은 세대의 전형으로 활용된다. 이는 이후의 세대에서는 여성의 적이 여성이 아니라 ‘동지'라는 시각으로 진화되어왔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이들 드라마의 여고 동창생은 같은 시절을 공유한 세대이다. 같은 시대의 음악과 놀이와 문화를 가진 세대 공감을 바탕으로, 이제 연대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함께 겪어가는 '동지'들이 되었다.

JTBC 드라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2014년 JTBC를 통해 방영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39살 여고 동창생 세 명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때는 꿈을 나누던 한 반 친구였던 소녀들은 이제 이혼한 싱글맘(윤정완- 유진 분), 골드미스의 대표가 되어버린 노처녀(김선미-김유미 분)에,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전업주부(권지현-최정윤 분)가 되어 동시대 30대의 '리얼 라이프'를 구현한다.

시한부 드라마 작가 이소혜(김현주 분)와 톱스타 류해성(주상욱 분)의 달콤 애절한 연애담을 그린 JTBC 2016년작 <판타스틱> 역시 여주인공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다. 그 시절의 첫사랑과, 그 시절 그녀의 친구들이었던 여성들이 서른 중반이 되어 다시 만나 그 시절의 사랑과 우정을 되살려 시한부로 인생의 종점에 이른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2017년 MBC를 통해 방영된 <이십세기 소년소녀> 역시 서른 중반이 된, 하지만 여전히 이십세기의 소녀와 같은 감성을 지닌 여고 동창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낸다.

웹툰 원작인 tvN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화제성과 시청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며 순항하는 가운데, 같은 수목 드라마로 또 한편의 웹툰 원작 드라마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웹툰 플랫폼 KTOON에서 호평을 받으며 시즌 3까지 이어지고 있는 <당신의 하우스헬퍼>가 동명의 드라마로 KBS2를 통해 방영을 시작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동명의 원작 속 인물들을 그대로 살려낸 것과 달리, <당신의 하우스헬퍼>는 남자 하우스헬퍼라는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오되 미니 시리즈의 호흡을 살려내기 위해 극중 여성들을 '여고 동창생'의 관계로 묶어낸다.

KBS 2TV 수목드라마 <당신의 하우스헬퍼>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판타스틱>, <이십세기 소년소녀>가 서른 중후반의 여성들을 전면에 세운 것과 달리, <당신의 하우스헬퍼> 속 여고 동창생들은 이제 스물 중반, 바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살기 힘들다는 88만원 세대의 여성들이다.

'온갖 잡다한 일을 시킬 때는 가장 필요한 사람 취급하고,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드라이조차 사치'인 인턴 임상아(보나 분). 친구 약혼식에 반품을 가정하고 명품 옷을 입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현실은 목걸이에 비즈나 꿰며 연명하는 백수 윤상아(고원희 분). 명색이 네일샵 사장이지만 유지비에 알바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자영업자 한소미(서은아 분). 이 세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 함께 살자고 약속하던 '몽돌 삼총사'였지만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상아의 오해로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남긴 집을 인턴 형편으로 지키지 못해 세를 놓은 상아의 집에서 세 여고 동창생이 다시 조우하게 되면서, 이 시대 이십대 후반 여성들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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