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지난 7일 혜화역에서 여성 단체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제3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가 열렸다. 이번 3차 시위에서는 이전 시위부터 문제가 됐던 ‘생물학적 여성 한정’이라는 조건뿐 아니라 ‘재기해(고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의 남성 비하 구호가 논란이 됐다. 특히 일부의 ‘문재인 재기해’라는 구호나 ‘곰(문재인 대통령의 자살을 뜻하는 은어)’ 퍼포먼스는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위원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부분 좀 과격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지금 언론들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이 시위와 여성들의 구호를 소비해 버리면서 시위의 본질을 좀 비켜 나가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밝혀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일부 시위 참가자들의 과격한 표현은 어느 시위에서나 일반적이고, 권력자에 대한 조롱이나 풍자는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법촬영’은 인권의 문제이므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문제는 ‘재기해’라는 구호가 일부의 과격성이 아닌, 주최 측 ‘불편한 용기’의 폐쇄적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폐쇄적 정체성은 정치적이지 못한 데다 전략적으로도 실패다.

혜화역에서 개최된 제 3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 모습(연합뉴스)

‘재기해’나 ‘자이루’ 등의 남성 비하 구호는 여성 혐오 사회를 비추는 미러링의 일환이다. 미러링은 그 효과가 빠르고 강렬하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기존 사회의 문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러링의 속성 덕분에 많은 이들이 여성 혐오 사회를 역지사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러링은 곧 기존 사회의 문법에 갇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러링은 새로운 페미니즘의 문법을 제시하고 소통하려는 정치적 언어로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조롱’을 미러링하는 것은 ‘조롱’에 불과하다. 이는 ‘빨갱이’에 ‘수구꼴통’으로 답하는 것처럼 소통과는 정반대다.

구호 ‘문재인 재기해’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불법촬영에 대해 ‘여성의 성적 수치심, 명예심을 존중해야’라며 인권의 문제로 보지 못한 것은 확실히 단견이다. 또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한 뒤의 행보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재인 재기해’ 구호나 ‘곰’ 퍼포먼스는 이러한 지점을 겨냥하지 못한다. 그저 집단 내부에서만 맴돌고 있어 ‘감정 표출’에 불과하다. 게다가 주최 측 ‘불편한 용기’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라는 변명을 했다. 그리고 이 변명은 시위 ‘일부’를 명백히 옹호하는 제스쳐다.

시위는 정치적 행위다. 정치적 행위는 곧 정치적 목소리를 관철하는 일이다. 이 목소리는 단순히 머릿수를 늘리는 것이 아닌, 타자들을 설득해 나가는 일이다. 하지만 주최 측이 시위 참여자의 자격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한 것이나 개인 인터뷰를 금지한 것, 일부 언론사의 취재만 허용한 것은 내부의 ‘동일성’만을 지키겠다는 의사다. 이러한 동일성은 곧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다. 실제로 주최 측 카페 게시물 중에는 기혼여성은 시위에 참여하면 안 된다거나, 같은 날 개최된 낙태죄 폐지 시위를 배척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는 일부의 목소리라기보다 시위 자체의 폐쇄성이 마련한 현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동일성은 연약하다. 내부의 갈등을 포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불거진 주최 측 스텝 내부 불화도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다.

주최 측의 폐쇄성은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에서도 드러난다. 주최 측 요구 사항 중에는 ‘여성 경찰관 90% 비율 임용, 여성 경찰청장 임명, 문무일 검찰총장 사퇴’가 있다. 여성의 임원 비율이 낮고, 기득권 사회가 남성 중심적인 것은 명백히 사회적 문제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여성의 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자리도 있었다. 여성가족부가 행정안전부, 경찰청과 함께 마련한 행사에 주최 측 운영진이 참석해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발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정부의 보여주기식 행위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다시 강조하건대, 불법촬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이번 시위에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인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정확한 정치적 전략과 언어 없이 무조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를 동등한 정치 행위 주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집단 내 폐쇄성은 외부에 대한 입지를 좁힐 뿐 아니라, 내부 분열에 치명적이다.

독일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정치 행위를 ‘공연예술’에 비유했다. 공연예술은 독립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창조예술’과 달리 관객이 필수적이다. 이는 곧 관객에게 공연의 해석을 맡긴다는 뜻이며 그 해석은 오해나 단절의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이에 대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불안한 안전함이 아닌, 갈등과 잡음을 감수하며 타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편한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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