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출범했다. 불합리한 제작환경 속에서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며 노동권을 넘어 인권까지 침해받고 있는 방송제작 스태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방송스태프지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노조 출범을 공식 발표했다. 김두영 방송스태프지부 준비위원장은 "저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조명 파트 일을 하고 있다"며 "밥 먹는 시간도 지키지 못하고 잠잘 수 있는 시간도 없다"고 호소했다. 김 위원장은 "지금 소화하고 있는 일정도 오전 7시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 4시에 종료된다. 이후 사우나에 잠깐 갔다가 다시 오전 7시에 출발하는 이런 식의 일정"이라고 전했다.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방송스태프노동조합 출범 기자회견(연합뉴스)

김두영 위원장은 "우리에게 현장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이 매일 연예인도 보고 돈도 많이 벌겠다며 부럽다고 하는데, 우린 이런 장시간 노동에도 추가수당이라는 게 일절 없다"고 전했다. 이어 "무엇보다도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보니 잦은 사고가 발생한다"며 "큰 사고는 뉴스가 되지만 잠깐일 뿐이고 뉴스에 나오지도 않는 사고가 많다. 안전 대책이 없는 현장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김두영 위원장은 "우리 스태프들이 늘 하는 얘기는 '밥 좀 제 때 먹자', '잠 좀 제대로 자보자' 이런 사소한 것들인데, 이게 꿈이 돼버렸다"며 "7월 들어 노동시간 단축을 한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오늘 현재까지도 제작현장은 변한 게 없다"고 한숨지었다.

김두영 위원장은 "방송사들과 제작사들은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법을 지키지 않고 일부 단체나 개인이 항의해봤지만 무시하기 일쑤"라며 "우리는 7월에 접어들면서 노조를 통해 정당하게 한 번 싸워볼 생각으로 여러 직군들과 함께 노조를 출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가족과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우리에겐 꿈 같은 직장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연대발언자로 나선 김유경 노무사는 "직장갑질119 오픈채팅에서 우리가 갑질을 제보 받으면서 특히 상황이 심각한 업종에 대해서는 분화된 카톡방을 만들었고, 그 중에 하나가 방송갑질119였다"며 "11월에 출범하고 채팅과 이메일로 많은 제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김 노무사는 "하루 2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다반사고 화유기 추락사고, 상품권 페이, 뉴스토리 해고, 각종 루트로 성폭력 제보도 이어졌다"고 소개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1970년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당시 경향신문 1면 기사 내용이 골방에서 하루 18시간 노동한다는 것이었는데, 21세기에 하루 20시간 노동이 가능한 얘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며 "그런데 현장노동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해가 됐다. 20년 가까이 '방송업이 원래 그렇다'는 모든 불합리가 관행처럼 인정됐던 경향이 강했고, 사용자들이 노동자성을 지우는 노력을 전개해왔다"고 강조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게 불가능하다는 절박함이 모여 노조 출범으로 이어졌다"며 "다양한 스태프가 모였고, 현행 노조법의 한계가 분명히 있지만 이를 뛰어넘는 투쟁이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노무사는 "가장 중요한 건 노동시간 52시간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정규직과의 끈끈한 연대를 통해 방송시스템의 불공정 관행을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기자회견문 낭독에서 방송스태프지부는 "방송제작 스태프 노동자들은 적정한 근로계약과 임금산정 기준도 없이 '갑'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고, 방송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을'이 떠안아야 하는 불합리한 계약관행 아래 모멸감과 분노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무엇보다도 방송제작현장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태는 잠잘 수 있는 권리인 수면권 마저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우리는 비참함을 금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노동부, 과기정통부, 문체부, 방통위 등 정부 관련부처와 지상파를 비롯한 방송사, 거대 외주제작사에 8가지 권리를 요구했다. 방송스태프지부가 요구한 것은 ▲살인적 초과노동 중단과 노동시간 단축 ▲정당한 임금과 초과 노동수당 지급 ▲점심시간·휴게시간 보장과 안정적인 식사 제공 ▲하루 8시간 수면권 보장 ▲야간 촬영 종료시 교통비·숙박비 지급 ▲불공정한 도급계약 관행 타파 ▲근로시간과 적정임금 명기된 근로계약서 작성 ▲방송제작 스태프 들에 대한 차별금지와 인권 존중 등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선한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한국 드라마의 성공 뒤에는 밤샘 촬영이란 악습이 있다. 드라마 뿐이 아니라 교양, 예능, 시사를 비롯해 모든 방송에는 밤샘 방송기획, 밤샘 촬영, 밤샘 편집이 있다"며 "보이지 않는 드라마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추혜선 의원은 "지난해 말 정부부처 합동으로 대책을 내놨지만, 강제성 없는 표준계약서는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며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콘텐츠를 만들려면 더 이상 방송이 노동의 사각지대가 되면 안 된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방송현장 혁신에 단단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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