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선거가 끝나면 이렇게들 말한다, 선거에서 표출된 '민의를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말이다. 일종의 정치 문법이다. 물론 그 이후 정치인들이 이를 진정 '겸허히 수용'하는 것을 나로서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연 '민의' 또는 '민심'의 실체가 무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도대체 이번 대선의 '민의'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민심이 천심'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통용되어 온 화법이다. 근대 이전사회에서는 민란, 반란 등의 정당화 명분으로 이용되어 온 말이다. 하지만 초자연적, 초사회적 '천(天)' 개념을 '현대'의 눈높이에서 즉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말은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다분히 '정치신학적' 혹은 역사철학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를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 곧 현대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보면 어떤가. 대중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무정형의' 대중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항상 옳은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예를 들어 대중의 절대 지지에 힘입어 집권한 히틀러, 거의 예의 없이 99.9%의 지지를 받았던 박정희의 유신독재, 광주학살에도 불구 '합법적으로' 집권한 뒤 여대야소를 유지했던 전두환 정권 등에서 대중의 선택은 옳았던가. 여기서 우리는 강압과 정보의 부재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수의 공학'에 기반한 현대 민주주의의 심각한 딜레마를 본다. 민중이라는 개념을 역사철학적으로 즉 '역사발전의 주체'식으로 볼 때 민중은 '정의상' 언제나 옳다. 그러나 탈역사철학적 실체인 대중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절대선은 더더구나 아니다. 현실에서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예리하게 구분해 내기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17대 대선의 특징…중도의 보수화

▲ 한겨레 12월21일자 3면.
다분히 추상적인 그러나 불가피한 이러한 문제설정을 염두에 두고 이번 대선을 보자. 경험적으로 한국 정치의 이념 지형은 진보, 중도, 보수 비율을 대략 3:4:3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보수후보인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3후보의 득표율을 합한 값이 약 35%이니 이번 대선에서도 그 비율은 유지된 셈이다. 그런데 이명박, 이회창 두 보수후보가 득표한 비율이 약 64%라고 할 때, 정치공학적으로 중도 즉 '중원'이 통째로 보수진영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17대 대선을 진보개혁진영의 '역사적 대패'라 불러도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중도의 보수화에서 찾을 수 있다.

17대 대선은 매우 '계급적(?)' 선거였다. 이명박 후보의 경우 대한민국 부의 상징이라는 서울 서초구 64.4%, 강남구 66.4%, 성남 분당구 61.5%를 득표, 평균득표율 48.7%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반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경우 이 지역에서 각각 1.4%, 1.3%, 1.9%만을 득표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다. 특히 이명박 후보가 압구정동에서 79.8% , 타워펠리스가 있는 도곡2동 제4투표소에서는 심지어 86.4%를 득표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그런데 '노동자 도시'라 일컬어지는 울산은 어떨까. 이명박 후보는 울산 북구 47.2%, 동구 49.5%를 득표한 반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북구 16.6%, 동구 10.4%만을 득표하였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이번 대선은 노동자보다 훨씬 더 투철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강남'의 계급투표와 노동자들의 탈계급적 투표성향이 두드러진 선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선언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노골적인 지역주의 선동은 잦아들었는지 몰라도, 강고한 지역 투표경향은 여전함을 이번 대선은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이명박 후보는 대구 69%(88만표), 경북73%(103만), 울산 54%(28만), 부산 58%(102만) 경남 55%(84만)등에서 총 405만표를 득표하였다. 반면 정동영 후보는 대구 6%(7만5천) 경북6.8%(9만7천), 울산 14%(7만), 부산 13%(24만), 경남 12%(19만)등 총 67만표 정도만을 얻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정동영 후보는 광주 80%(53만), 전북 82%(78만), 전남 79%(76만)등 호남에서 총 207만표를 득표하였고, 반면 이명박 후보는 광주 8.6%(5만7천), 전북 9%(8만6천), 전남 9%(8만9천)등 총 23만표를 얻었다.

즉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텃밭이라 할 TK지역에서 70%의 몰표를 얻었고, 정동영 후보의 경우 호남지역에서 80% 전후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 총득표수에서 이명박 후보가 영남에서 400여만표를, 정동영 후보는 호남에서 200여만표만을 얻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지역투표에서 2배의 격차를 보인다. PK지역에서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은 평균 55.6%인데, 이는 이 지역에서 20%대의 지지를 거둔 이회창 후보 사이에 표의 분산 때문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호남은 비호남에 의해 역포위된, 그래서 지역주의타파를 가장 높이 외치던 정권의 말기에 지역주의는 화려한 부활을 선언한 셈이다.

경제가 주도한 17대 대선 …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경제

▲ 경향신문 12월21일자 사설.
나는 대선전 <미디어스> 칼럼을 통해 이번 대선이 <성장프레임에 갇힌 보수적 대선>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번 대선은 시종일관 '경제'가 주도한 대선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경제인가이다. 당연히 이 경제가는 국민경제라든지, 다함께 잘 사는 공동체 경제와는 별무상관인, 우선 나부터 살고 보는 경제, 그러한 극단적인 이기적 경제를 말한다. 이명박식 경제, 신자유주의 경제를 지지하는 계층은 나름대로 완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주지로 서울, 수도권, 연령으로 40-50대인 고소득, 고학력, 남성 유권자가 그들이다. 이들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주가와 집값에 의해 지지된다. 한때 '강남좌파'라 불리웠던 노무현정부의 부동산정책에 실질적 혜택을 보았음에도, 종부세 '폭탄'에 극단적 반감을 드러냈고 이들의 경제적 이익을 조중동 등 보수지는 '정권교체'라는 담론으로 포장해 주었다. 한국사회 상층 내지 중상층에 포함되는 이 집단을 코어로 하면서, 이명박 후보에 대한 '생계형' 지지층이자 전통적 중간계층인 중소 자영업자계층이 그 아래에서 정권교체의 '하사관' 기능을 수행한다. 온작 도덕적 추문에도 거의 흔들림 없이 이명박 후보에 강고한 충성도를 보였던 이 집단이 결과적으로 볼 때 사회전체 여론뿐만 아니라 영남의 지역여론을 끌어 당긴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시민사회'의 기초를 개인의 '욕구체계'에서 보았다. 즉 근대적 개인의 자기보존 욕망의 체계야말로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민주화, 평화 등 경제외적 요인이 제대로 걸러진 개인의 욕망이 가장 잘 드러난 아주 '현대적'인 선거였다. 설사 그 욕망이 저질스러운 B급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명박 후보는 이러한 사적 욕망의 보수적 결집에 성공하였다.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보수에 대한 절차적 특혜는 소멸된 지 오래다.

실제로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에서나 이후 온갖 네거티브로 점철된 본선에서나 이명박을 정점으로 한 우리 사회 보수블록이 절차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훼손한 일은 없다. 경쟁은 '공정'했고, 또 자유로웠다. 선거과정에서 좌파라 볼 군소후보들의 발언이 저지된 일도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돈이 있으면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대로 된 경쟁에서 보수블록이 제대로 승리한 선거가 이번 대선이 아닌가 한다.

한국사회에서 신보수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

▲ 경향신문 12월20일자 1면.
소위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고, 시대정신의 정곡을 강타한 결과 거둔 승리였다. 보수블록이 자유, 공정한 경쟁을 통해, BBK라는 장벽을 넘어 쟁취한 승리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신보수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명박의 신보수주의는 분명 이회창 등 구보수의 보수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향후 맹목적 반북한보다는 이른바 '실용적 반북'을 채택할 것으로 보이고, 사회복지의 완전해체보다는 이른바 '업적국가(workfare-state)적인' 재편을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경제살리기 처방은 그 자체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규제완화,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복지축소, 세금감면, 노조길들이기, 작은 정부 등 서구사회에서 지난 20-30년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실험되었던 모든 것이 포장을 달리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년 DJ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IMF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실험되었던 것들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자신의 지지자 곧 '집또끼'를 내놓으면서까지 닦아 놓은 FTA체제는 이명박 정부의 좋은 출발점이다. 이명박 정부로서는 '경제살리기'라는 미명하에 이제 신자유주의 전면화의 길을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지난 10년 DJ, 노무현 정부가 갈지자로 왔던 길을, 이제 똑바로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신발전체제'는 박정희류 개발독재와는 엄연히 구분되고 그리고 당시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전면적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노조를 비롯한 사회세력 길들이기 과정에서 노조 및 시민사회와 상당한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노무현정부가 미군기지 이전 반대, FTA 반대진영에 행했던 탄압이라는 전례를 모범 삼으면 될 일이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 역사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신보수 정권이다. 확고한 사회적, 지역적 기반과 보수적 미래전망을 갖춘 정권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내밀 정책수단 즉 신자유주의는 그 효과와 한계가 이미 알려진 낡은 것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새롭지만 낡은 정부이다. 신자유주의 처방이 기업에 더 유리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들의' 경제가 살 지는 몰라도, 이명박 정부에 과잉기대를 보낸 대중의 경제가 살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젊은 시절 운동권 주변을 '대충' 서성댄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손을 못 씻었다. 태어나 한 일이라고는 읽기, 쓰기가 다이고, 여태 모자라 아직도 계속한다. 그래서인지 학문적 오지랖이 꽤나 넓다. 주특기가 정치사상사이고, 누가 보든 말든 통일문제, 한미관계, 국제통상도 오래전부터 계속해오고 있다.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 10년 가까이 영화인들과 손발을 맞추어 왔고, 한미FTA 때문에 너무 자주 TV에 등장했다고 핀잔도 많이 먹었다. "불신(不信)만이 살 길이다"를 모토로, 불신의 정치철학을 세워보는 프로젝트를 혼자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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