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직후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와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겸손한 자세로 자만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연이어 했다. 대통령은 특히 청와대 참모들에게 언제까지나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을 수는 없다며 분위기를 다잡았다. 여당 의원들 중 지방선거에서 압승했으니 앞으로 마음대로 권력의 단물을 즐기며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좋은 일이다. 이런 태도는 선거 승리로 오만해졌다가 실패한 과거 정부 사례의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런데 이쯤에서 오만한 것은 무엇이며 또 겸손한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검경수사권 조정이다. 21일 정부가 내놓은 검경수사권 조정안은 냉정하게 말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검찰이 부당하게 갖고 있는 수사 권력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이르지는 못했으면서 경찰에게는 굳이 늘려주지 않아도 될 대목에서 권력을 보장해준 것 아니냐는 얘기다. 경찰 권력 비대화를 견제할 장치로는 자치경찰제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이 대목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검찰과 경찰이 공통의 목표에 합의해 수사원리를 합리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서로의 권한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경쟁한 결과 아니겠냐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문제는 이것도 ‘정부안’에 불과하고 실제 입법은 국회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초토화된 야당의 상태로 인해 국회 정상화가 쉽지 않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국회의 결론은 현행 수준에서도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이 ‘디테일의 악마’를 추가로 쟁취하거나 수사기관 끼리의 암투가 이어져 국민의 기본권 보장 부분만 축소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검경수사권 조정 합의가 이뤄진 지점은 ‘오만’과 ‘겸손’ 사이의 어디쯤일까? 정부는 오만보다 겸손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만일 검찰 권력을 일방적으로 해체하는 수준의 수사권 조정을 도모했다면 보수세력은 이를 ‘승리에 취한 문재인 정부의 독주’로 규정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 서명식을 마친 뒤 경찰의 1차적 수사권 및 수사종결권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교조 지도부가 삭발을 감행하게 된 사연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에 ‘노조 아님’ 통보를 한 것은 해직자에게도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는 규약이 교원노조법을 위반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조 아님’ 통보는 행정처분일 뿐이므로 정부가 이를 취소하는 처분을 감행하면 1차적으로 문제는 해결된다. 전교조의 요구는 ‘노조 아님’ 통보를 취소함으로써 전교조의 활동을 보장하고 앞으로 교원노조법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달라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20일 법외노조 통보의 직권취소는 불가능하다면서 사법부의 재심이나 관련 법률의 개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전교조가 제기한 소송을 대법원이 2년 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고 국회에서 교원노조법 개정이 단기간에 이뤄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멀고 먼 길을 돌아가겠다는 답변을 한 셈이다.

김의겸 대변인의 브리핑 전날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법률자문을 통해 법외노조 통보의 직권 취소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청와대가 어떤 신호를 준 것인지는 분명하다. 정권이 부담을 안을 수 있는 행위를 밀어 붙이기보다는 입법부와 사법부로 공을 넘겨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것 아닌가?

주 52시간 노동 문제도 그렇다. 20일 더불어민주당은 고위 당정청회의를 통해 올해 말까지 6개월간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 이는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주 52시간 노동의 무력화를 기도해 온 경총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계도기간’이라는 게 주 52시간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적극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니 만큼 사실상 주 52시간 노동이 6개월 유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날 더불어민주당은 노동자가 사용자의 법 위반을 고소 고발하는 경우에 대해 사업주의 노력을 고려해 입건 유예 등 재량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애초에 주 52시간 노동은 1주를 5일로 본다는 고용노동부의 ‘비정상적’ 행정해석을 ‘정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도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기로 했으며, 휴일수당 중복할증을 폐지하는 대신 법정공휴일을 유급화 하는 절충까지 이뤄진 상태였다는 점에서 재계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라는 평가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결국 그대로 관철하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오른쪽)가 20일 오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정의당의 20대 국회 3기 원내대표로 선출된 노회찬 원내대표의 예방을 받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집권 여당의 뒷걸음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동계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은 경제 흐름을 봐가면서 추진해나갈 수밖에 없는데 노동계가 전혀 그런 이해 없이 무조건 올리라고만 하니 답답하다”, “최저임금은 경제성장률 등 제반 여건을 면밀히 감안해 노사정이 함께 결정해야 하는데 노동계가 무조건 인상을 요구하는 건 너무 심하다”며 사실상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의 후퇴를 시사했다.

이러한 일사불란한 뒷걸음질의 원인은 무엇일까? 검찰과 관료, 재계를 중심으로 개혁의 중도화를 실제로 기도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지방선거의 승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적폐청산’의 절실함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에게 안도감을 안긴 것으로 보인다. 지난 주말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사퇴론이 불거지고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오히려 대립구도를 키워가며 공정거래위가 압수수색 당하는 것까지 보면 “개혁은 이제 여기까지”라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문재인 정권은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더불어민주당은 전당대회 일정을 앞두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언론은 이해찬 의원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유력 후보로 꼽고 있다. 이해찬 의원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당의 단결을 도모해 문재인 정권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카드로 여겨진다. 김부겸 장관은 더불어민주당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불모지인 대구경북을 공략하기 위한 ‘차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포장되고 있다 두 사람 다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오만하지 않은 태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중요한 것은 오만하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오만’과 ‘겸손’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다. 선거 직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정부 여당의 겸손한 태도가 개혁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게 한다.

검찰, 재계, 관료의 승리는 그들이 스스로 개혁에 대항하면서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정권의 개혁을 향한 의지가 변함없이 명확하다면 이런 목소리는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안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힘을 실어줄 것이다. 개혁을 둘러싼 ‘진짜 전선’이 이제 드러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