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됐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잦아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확산될 것 같다. 북미 양 정상이 회의론자들의 불만을 일소할 수 있을 만큼의 합의를 명문화된 형태로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북미정상회담 관련 협상은 두 가지 방향의 회의론 속에서 진행돼왔다. 첫째는 트럼프 행정부를 못미더워하는 미국 내 민주당 성향 세력들의 의구심이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문제와 같은 복잡한 외교현안을 파악할 능력이 없고 단기적 정치적 성과에 목을 매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은 합의를 할 것라는 의심을 갖고 있다.

둘째는 한국 내 보수세력의 의구심이다. 이들은 트럼프 행정부 특유의 신고립주의 노선에 따라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제거하는 대신 핵 폐기는 사실상 포기하고 심지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며 만일 이러한 일이 현실이 되면 한국은 앞으로 핵무기를 손에 쥔 북한에 협박을 당하며 손해를 보고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2일 양 정상의 합의는 놀랍게도 이들의 우려가 일리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합의문은 북한 체제 안정과 한반도 비핵화를 맞바꾸고 새로운 미북관계 수립,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 판문점 선언의 재확인, 전쟁 포로 유골의 즉각 송환 등을 추진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지만 전반적으로 원론적 선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회의론자들이 강조한 것은 북미 간 합의에 비핵화와 관련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또는 폐기) 원칙이 명시돼야 한다는 거였다. 국내 보수세력도 판문점 선언에 비핵화에 관한 원칙과 일정이 나와 있지 않다며 북미정상회담을 주시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에서 합의문에 CVID 원칙이 명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시간이 없어서 그 단어를 다 담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답변이지만 사실 진실은 이 대목에 숨어있다. 결국 북한이 CVID란 표현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협상할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이 대목이 실무적 차원에서 북한과의 협상이 길게 늘어진 핵심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양측의 실무협상을 주도한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정상회담이 열리는 전날까지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다. 따지자면 애초에 트럼프 대통령이 ‘5월 내 북미정상회담’이라는 촉박한 일정을 못 박은 것부터가 이런 상황을 예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군사훈련 중단까지 언급한 것은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군사훈련에 엄청난 비용이 소모된다며 “괌에서 한국까지 와서 폭격 연습하고 가는 데 비용이 드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이번 정상회담에서 주한민군 철수 문제는 다뤄지지 않았고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도 자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12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합의문에 서명을 마친 뒤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연 회의론자들의 예상은 현실이 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후맥락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다른 면’도 봐야 한다. 먼저 한미군사훈련에 대해서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먼저라는 입장이다. 한미군사훈련의 전면적 중단을 위한 준비나 논의가 지금까지 이뤄진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군사훈련 중단은 북한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바다. 한미군사훈련이 이뤄지면 북한도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북핵문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군사적 행동을 주고받는 상황에선 제대로 된 협상이 어렵고, 그렇잖아도 제재로 어려운 북한의 경제력으로는 자체 군사 훈련 등의 대응을 뒷받침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과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한시적으로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과거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이 이듬해까지 중단됐던 게 전례다. 만일 북한과의 협상이 잘 돼서 비핵화가 제 궤도에 오른다면 한미군사훈련의 중단은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비핵화에 진척이 없을 경우 한미군사훈련은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이 부담스러워하는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를 중단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괌’과 ‘폭격’을 언급한 것은 스텔스기능이 탑재된 F-22 전투기나 B-1랜서와 같은 폭격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 경우 한미군사훈련은 ‘예년 수준’으로 진행될 수 있다.

세 번째는 실제 한미군사훈련의 중단 여부와는 무관하게 남한 정부에 보낼 ‘청구서’를 예고하는 발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용문제를 재차 언급하면서 “(한미군사훈련이) 한국과의 무역협정 문제와도 연결되고 있다”고 했는데, 결국 방위비분담금 또는 한미FTA 등 무역불균형 문제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모두 우리 입장에선 손해가 되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단순하게 볼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한미군사훈련이나 미군 주둔 문제는 북한과 논할 주제일 뿐만 아니라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 패권 경쟁과 관련된 사안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국은 최근 중국과 사실상의 무역전쟁 초입에 돌입한 상태고 북미회담의 성과는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단순히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 털고 나간다는 식으로 볼 것은 아니다.

다시 북핵문제로 돌아오면, CVID가 합의문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서도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가 빠른 시간 안에 시작될 것이고 이를 검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북미정상회담 이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주도하는 고위급 회담이 예정돼있다는 것이다. 전사자 유해 발굴 등의 합의 이행을 위해서라도 북미 간의 협상 국면이 이어지는 것은 필수적이다.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함께 협상 국면이 이어지면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예고한대로 가을 정도에는 김정은 위원장의 백악관 방문이나 남북미중 4자 간 종전선언 등도 현실화될 수 있다. 갑작스런 위기로 궤도에서 일탈해 다시 갈등 국면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셈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결국엔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는 회의론자들의 주장은 이러한 과정이 잘 진행되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비핵화가 달성되는가는 결국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은 정치권이 기대하는 것처럼 빠른 시간 안에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시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 프로세스가 일단 시작되고 IAEA 등의 공신력 있는 기구의 개입이 보장된다고 한다면 반드시 북한 내의 모든 핵물질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이 최종 확인되지 않더라도 비핵화의 완료를 잠정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후의 국제정치적 변화에 따라 북한이 비핵화 프로세스를 중단하고 핵물질 생산을 목표로 한 활동의 재개에 돌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까지 따지자면 미국 내 강경파들의 주장처럼 김정은 위원장의 관저나 조선노동당사 등의 통치 관련 핵심시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찰과 핵물리학자들의 국외추방까지 논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의심’은 하려고만 들면 끝없이 할 수 있다. 어느 시점에서 의심을 거둘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문제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고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 속에서 해소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비핵화의 기술적 달성은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모두가 인정할 때에야 가능하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고 이번에는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기하겠다고 한 것은 트럼프식 고립주의와 짝을 이루는 어떤 ‘쇼’일 수도 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즉, 이런 면에서 볼 때 북미 양국이 공감한대로 비핵화는 체제안정과 동전의 양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봉건왕조에 준하는 독재체제라 할지라도 이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길 뿐이다. 북미정상회담의 미진한 합의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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