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판문점 북측 통일각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러 간 것은 예상하지 못한 한 수 였다. 남과 북의 지도자가 수시로 만나 대화할 가능성은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릴 때 이미 예고됐다. 그러나 이번 국면에서 이를 쉽게 떠올리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핫라인’이 먼저 가동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재인 대통령의 판문점행으로 한미군사훈련 논란 이후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는 다시 풀릴 수 있게 됐다.

한반도 정세는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성격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맥락은 북미대화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싱가포르 회담 무산 통보 이후 논의의 정상화를 공식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각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25일 북한이 먼저 제의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무산을 선언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때문에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위임에 따른 담화’와 하나의 흐름 안에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나온 미국을 향해 판을 깰 의사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액션의 연속이 이뤄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통보 이후 북한이 저자세로 나온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처럼 군사적 도발로 대응하였다면 북미대화 국면은 당분간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고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운전자론’도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기회를 활용해 북미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단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앞으로의 일이 평탄대로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이 과연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의 요구를 어디까지 수용할지 여부다.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남북정상회담 관련 질의응답을 진행하면서 북한이 미국이 주장하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원칙을 수용했는지에 대해 “그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드맵은 북미 간에 협의할 문제이기 때문에 앞질러서 내 생각을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북미간의 비핵화 해법에 대한 차이만을 확인한 게 아니겠느냐고 해석하고 있다.

이런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북미정상회담 관련 논의가 다시 제 궤도로 돌아왔다고 해도 비핵화 로드맵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이 협상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CVID라는 어떤 원칙을 받아들였느냐 아니냐로 해석할 문제는 아니다. 실제 협상 구도는 단지 CVID라는 수사로 표현하기에는 훨씬 복잡해보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연합뉴스)

당장 CVID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미국의 입장이 불분명하다. 존 볼턴 백악관 NSC보좌관 등 이른바 ‘네오콘’들이 주장하는 CVID는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의 핵능력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는 비핵화 관련 판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조치이다. 북한은 성실하게 자신들이 보유한 핵물질 일체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해야 하고, 이와 관련해 거의 무제한적인 사찰을 받아들여야 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핵무기 일부를 미국으로 가져와 해체하는 방안을 용인해야 한다. 심지어 북한의 핵과학자들을 국외이주 시키는 방안까지 보도된 바 있다. 존 볼턴 등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해법’은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등은 리비아식 해법이 아닌 ‘트럼프 모델’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첫 번째 방북 이후 기대감을 보인 것도 이 ‘트럼프 모델’인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 모델’은 공식적인 로드맵에 기초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쟁점의 일괄타결과 압축적 합의 이행이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이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여론의 부정적 평가를 피해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이 기준을 맞추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 내 여론은 여전히 회의론에 가깝다. 미국 주류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를 위해 북한에 이로운 합의를 해줬다는 비난을 할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북한이 국내 비난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어떤 ‘충격적인’ 방식에 합의를 해줘야 한다. 지금 상황에선 핵무기 일부를 미국으로 반출하는 방식 등이 유력하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선 미국이 체제보장을 어떤 수준까지 해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완전한 ‘무장해제’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리비아 모델’이 결국 무아마르 카다피의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리비아 민주화 시위 국면에 자신들이 개입해 카다피를 결과적으로 살해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북한을 안심시키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까지 등에 업은 북한은 미국을 쉽게 신뢰하는 모험을 하기 보다는 선거가 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처지를 이용해 강경파들을 분리하고 비핵화 로드맵 관련 협상을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조정하려 시도한 것 같다. 그 결과가 존 볼턴 보좌관을 정조준한 김계관 제1부상이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겨냥한 최선희 부상 등의 성명과 언급이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외교적 결례’ 논란이 벌어진 것도 이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중재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을 가늠해보려 한 듯 싶다. 그러나 남북 간의 대화 통로가 막혀있는 상황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말을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 관련 답변에 대해 “번역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아마 이미 들었던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말 그대로 자기가 원하는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게 이미 확인돼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해석해보면 어떨까. 이것은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이 갖고 있을 수 없었던 ‘답’을 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후 비핵화 관련 협상에서 북한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을 보인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물론 예측불가능한 두 집단의 협상이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때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을 통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문제에 대한 남북의 당사자성이 북미대화와 ‘한반도운전자론’을 모두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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