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에 한번 가볼 것을 권한다. 대선으로 어지럽던 지난 5일 일반인들이 개성을 관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글이 개성 관광을 이뤄낸 현대아산의 구미에 맞는 내용이 아님을 우선 밝힌다. 괜한 오해 없길 바란다.

개성 관광은 금강산 관광처럼 편하게 유람하고 올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제반 시설의 형편도 그렇지만 말로만 듣던 '그 쪽'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6일 개성에 갔다 왔다. 전에 근무하던 방송기술인연합회에서 동행을 권했다.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나드는 긴장감이 있었다. 이런 긴장감은 금강산 관광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선죽교 전경, 유명 관광지엔 나무가 제법 보인다 ⓒ안현우
중요한 것은 개성 시내에 산재된 문화재를 둘러싼 그 곳의 모습이다. 보고 온 것은 개성의 유명 문화재인 영통사, 숭양서원, 선죽교, 고려박물관인데 남는 것은 그 곳의 사람, 거리, 산의 모습이다. 물론 그 곳 문화재가 갖고 있는 의미가 적다는 것이 아니다.

북한 안내원이 버스에 탑승하기 전, 운전기사는 조심해야 할 사항을 전한데 이어 “얼마나 ‘퍼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퍼준다’라는 말에는 남한 사회에서 벌어졌던 논란과 다른 한편으론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어 적절치 않다는 것을 안다. 직접 개성을 접하고 나면 ‘퍼주기 논란’이 근거를 갖기 어려운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문산에서 개성은 고작 버스로 20분 정도의 거리이다. 그 보다 크게는 몇 킬로미터 안 되는 거리 이상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있다. 동행했던 '어른들'은 단적으로 남한의 60년대라고 말씀하셨다.

북녘은 가로수는 고사하고 산에 나무가 없다. 들녘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산은 온통 민둥산이다. 이유야 부족한 생활 연료를 나무로 대체했기 때문인 게 자명하다. 몇 해에 걸쳐 발생했던 폭우로 인한 홍수 피해가 이해된다. 원래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토양은 아닌 것 같다. 첫 번째 방문한 영통사는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숲이 우거져 햇볕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지만 옛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절도 몇 가지 유물을 제외하고는 얼마 전 신축된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한 관광객을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고려의 수도라는 역사로부터 단절됐으며 나무라고 하는 자연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게 개성의 모습이었다. 이 곳에 다시 나무가 자랄 수 있는지 의문이다.

토양의 사막화도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안내원은 질 좋은 비료가 있어야 토양을 살려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그럴만한 시설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지원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얼마 전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남한이 대북 비료지원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개성시내 거리에 있는 건물의 모습도 별반 차이가 없다. 사람이 과연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몇 개의 고층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의 건물이 회색빛으로 통일됐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거리에 지나가는 주민들의 바쁜 걸음을 제외하면 죽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활력을 띤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밖에 없었다.

▲ 영통사와 북한 안내원 ⓒ안현우
고려시대 성균관을 개조한 고려박물관에서 한 아이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한 아이가 아니라 8살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19세의 청년이다. 8살의 모습을 한 19세의 청년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고려박물관에 있는 약수터에 물을 길러왔다고 한다. 그 청년과 마주친 한 관광객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으며 몇 살이냐는 질문이다.

그 청년은 ‘약수를 구하러 왔으며 나이는 열아홉’이라고 답했다. 옆에 있는 나나 질문을 던진 관광객이나 믿기질 않는다. 초등학교에 이제 막 들어갔을 나이로 보이는데 ‘열아홉’이라고 답하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식량 부족의 실상은 쉽게 이해됐다. 부족한 식량과 그에 따른 영양 결핍의 결과다. 그 결과는 자라나야할 아이들에게서 '처참하게' 확인됐다. 치사하게 먹는 것 가지고 무기로 삼지 말자는 생각이 간절했다.

골목에서 숨어 손을 흔드는 아이들, 옹기종기 모여 담장 위로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개성 주민들을 버스 창 너머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들에겐 우리가 동포라기보다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 같다. 10대를 넘어선 버스를 나눠 타고 앞 뒤 호위 차량까지 대동시켜 개성시내를 이러 저리 휘젓고 다닌 관광이 개성주민의 일상에,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지 내심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쪽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아오지 못했다. 다만 마음 속에만 있다. 반입물품에 대한 제재가 상당히 심하다. 필름카메라는 절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문제가 되는 사진을 삭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카메라도 고배율의 줌 기능이 있으면 반입 금지된다. 북한 당국이 허락한 곳만 찍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확인 절차도 철저하다. 휴대폰, MP3 등 통신, 저장매체도 반입금지다. 눈 이외에 그 곳의 산, 거리,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도구는 없다. 그래도 마음 속에 담긴 그 곳의 실상은 그 보다 오래갈 것 같다.

기록하는 자로서 그 곳의 실상을 몰래 담아와 이 글에 첨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의 기억 때문이다. 그 쪽 주민들과의 접촉과 사진 촬영을 막았을 뿐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다. 내 기억엔 정반대의 생생한 우리의 풍경이 있다. 88올림픽 때 강제철거, 2002년 월드컵, 2005년 부산 아셈회의 때 우리의 가난함을 가리려는 차단막이 있었다. 가난한 국민이 창피했던 것이다. 자존심이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들에게서 자존심은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개성주민에게 향했던 막연한 동정심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참, 현대아산이 개발 중인 개성공단의 자전거 도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한 거리의 인도에 구색 맞추기식으로 만들어진 자전거 도로와 비슷하다.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차가 없는 개성 거리라고 하지만 인도에 자전거 도로가 엄연히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혀 불편해 하지 않는 모습이다. 남한의 자전거 도로가 북한의 자전거 도로를 대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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