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 1만여 명이 모였다. ‘붉은 악마’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질서에 반기를 들고 나선 여성들이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에 모인 여성들은 최근 홍대 몰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에 문제의식을 갖고 모였다고 한다. 홍대 몰카 사건이 성별에 따라 편향적으로 처리됐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어서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수사가 진행됐고 즉각 구속영장까지 발부된 것은 결국 범인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경찰도 할 말이 있다. 결국 용의자는 누드 크로키 수업에 참여한 20명 뿐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하기가 쉬웠다는 것이다. 또 구속영장 발부도 몰카를 찍은 휴대전화를 한강에 버려 증거를 인멸했다는 요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기관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러나 납득이 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시위에 나선 여성들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간 숱한 사례를 통해 경찰이 미온적 태도를 보여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는 사례를 보면 경찰은 그간 여성이 피해자인 몰카 사건을 수사하면서 어차피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니 포기하라거나 피해 상황이 더 자세히 찍힌 장면을 출력해오라거나 하면서 2차 가해를 저질렀다고 한다. 경찰의 현재를 돌이켜 볼 때 이런 피해 사례를 단지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 수준으로 평하기는 매우 어렵다.

몰카 동영상에 남성과 여성이 한 화면이 똑같이 등장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여성이 훨씬 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는 이 사회에 깊게 뿌리 내려 일종의 ‘기본 문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영상들은 인터넷상에서 끝없이 유포되고 또 공유되기 때문에 완전히 다 찾아내 지울 수조차 없다. 피해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남성들은 몰카 동영상을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로서 소비하는 기본 틀을 벗어날 줄 모른다. 많은 남성들에게 몰카 동영상은 그저 ‘음란물’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인터넷 일부에선 아예 여성 자체를 ‘음란물’로 간주한다. 여성이 무엇을 하든 화면 안에 들어가면 ‘음란물’이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이 존재하고 또 변할 기미도 없기 때문에 경찰의 설명은 안타깝게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새 정부에서 경찰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몰카 동영상의 피해를 언급하며 강한 대응을 주문하는 상황에서 하필이면 여성이 범인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경찰이 할 일은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몰카 사건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신뢰가 쌓여 가면 경찰의 설명을 납득하는 흐름도 생겨날 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일선 경찰관들에 대한 성인지 교육이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공유되는 사례를 보면 성범죄를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기본적 상식이 없다는 의구심이 들만한 것들이 많다. 이런 일의 반복은 경찰의 신뢰 저하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 경찰 직무 수행을 위한 교육 과정들에 성인지적 감수성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 피해자가 남성이어서 경찰이 이례적으로 강경한 수사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인근에서 시위를 열고 공정한 수사와 몰카 촬영과 유출, 유통에 대한 해결책 마련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수사기관의 행태가 개선된다고 해도 문제의 해결이 요원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차적인 원인은 기술의 발달을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몰카 피해는 디지털 방식의 촬영장비와 초고속의 인터넷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과거에도 피해가 있었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짓밟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건 소수에 그쳤을 것이다.

보도를 보면 이젠 아예 ‘촬영’이란 행위를 하지 않고도 머신러닝 기술을 이용해 음란영상에 특정인의 얼굴을 합성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음란물 유포 외의 어떤 법적 근거로 규제할 것인가? 이런 식이면 끝이 없다. 따라서 제도적 대안에 더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남성 스스로가 자신이 구조에서 차지하는 우월적 지위를 자각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에 나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술 발달에 발맞출 수 있는 공동체의 윤리를 형성해야 한다.

말과는 달리 현실은 쉽지 않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페미니즘’을 문제 삼는 남성들이 일으킨 사건들이 수차례 문제가 되었다. 특정 게임의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이 페미니즘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 불매운동을 벌이는 식이다. 이런 일에 열중하는 이들의 일부는 “왜 메갈은 되고 우리는 안 되냐”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둥 하면서 ‘비정상’으로 간주하거나 ‘메갈=일베’라는 도식을 전제하고 자신들의 활동을 ‘미러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인터넷 문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덕분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비교가 가능한 세상이 열렸다. 사람들은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한 일들, 즉 ‘피해’에 더 민감해졌다. 모두를 상대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은 주로 더 크게 나는 소리들만 확산시킨다. 온갖 ‘피해’의 전시장이 된 인터넷에선 가해자도 피해자를 자처해야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의 핵심은 실종되고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느냐”는 형식에 대한 문제제기만 남는다. 서로 해도 되는 행위와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정하기에만 바쁘고, 그런 행위들이 불러올 ‘결과’에 대해서는 그저 외면한다. 이런 일들의 반복 속에서 사회적 모순의 책임은 기득권이 아닌 소수자들에게 전가됐고 그게 서구에서는 극우주의 정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왜 메갈은 되고 우리는 안 되냐”는 말의 답이 여기에 있다. 여성은 소수자이므로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이 소수자로 머물러 있도록 강제하는 일은 누구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일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 이러한 장을 만드는 것이 결국 정치와 언론의 역할일 것이다.

혜화역에 모인 1만여 명의 여성들이 내건 구호들에도 ‘인터넷 문법’의 영향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왜 여자만 처벌하느냐”는 주장은 “범인이 여자라면 무죄”라는 결론을 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또 해결방법이 무엇인지는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오직 올바른 답만을 적어 낼 때만 수용할 수 있다”며 윽박지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다. 이 사건 피의자의 행위나 시위 자체의 어떤 문제들에 대해선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비판을 제기하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함께’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