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다. 북미정상회담 이후 남북미정상회담까지 이어서 진행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북미정상회담의 장소는 원래 싱가포르나 몽골이 고려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판문점을 언급하면서 여론이 요동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생중계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상당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걱정을 하는 이들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 성과보다는 이벤트에 치중해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차원이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가 대표적이다. 조선일보는 2일 기사에서 “미·북은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 3명을 정상회담 계기에 석방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이들을 직접 인도받는 장면을 생중계로 연출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면서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강력한 퍼포먼스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에 대해 “만에 하나 공명심이 유독 강한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상 욕심에 북핵의 본질은 남겨둔 채 핵 동결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 포기로 미 본토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선에서 타협한다면 우리에게는 최악의 결과가 된다”면서 “오는 11월 미국 중간 선거를 의식해 적당한 선에서 김정은과 타협하고 이를 ‘북핵 폐기’로 포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썼다. 이른바 ‘트럼프리스크’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반응은 국내의 보수세력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해외 언론도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 성향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대북전문가들은 대개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등에서 북핵 문제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미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증폭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정파적 맥락도 있다. 미국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북핵 관련 협상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는 흐름이 강하다.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 전통적인 매파적 견해를 버리지 않고 경계심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뭔가 트럼프 대통령 혼자 들뜬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상원 외교위원회 간사인 민주당의 벤 카딘 상원의원이나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애덤 시프 하원의원 등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외교 공로를 인정할만하다는 평가를 내놓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밤 청와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EPA 자료사진=연합뉴스)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북핵 문제의 핵심을 쉽게 포기할 것으로 예단할 수 없다. 존 볼턴 백악관 NSC보좌관이 이른바 ‘리비아식 해법’을 언급하면서 상황이 미묘해졌지만 북핵 문제 해결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조건 자체는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의 해결은 이란식이니 리비아식이니 하는 구분법으로 볼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각기 다른 조건과 맥락에서 고안된 해법들이기 때문이다. 존 볼턴 보좌관 본인도 북한에 비하자면 소규모에 불과했던 리비아에 적용된 해법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북한이 핵 폐기를 완료해야만 보상을 주거나 또는 북한이 보상을 먼저 받고 핵 폐기에 나서는 등의 극단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 결국 핵 폐기와 관련한 일정과 방식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 관해선 북한이 전향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신호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판문점 선언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은 완전하고, 불가역적이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와 같은 의미로 봐도 전혀 문제가 없다”며 “종전 선언이라던가 불가침 등이 보장되면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고 했다. CVID는 익히 알려진 대로 북핵문제 해결과 관련한 미국의 기본 입장이다.

물론 북한이 밝힌 바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검증이 이뤄져야 한다. 1일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의 통화에서 북한 핵 실험장 폐쇄 현장에 유엔이 참가해 폐기를 확인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북미정상회담 이전까지 핵 사찰과 관련한 대략의 계획이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보도에 의하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월 말에서 4월 초 방북했을 당시 ‘특별사찰’을 포함한 강화된 핵 사찰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고 한다. JTBC는 1일 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 시설을 어디든 다 봐도 된다”는 말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발언은 과거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에 핵 사찰의 수단을 두고 협상이 결렬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은 1993년 애초에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IAEA가 요구한 특별사찰을 거부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거론한 바 있다. 또 북한은 2008년 6자회담을 통해 도출된 2.13 합의와 10.3 합의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핵 사찰을 위한 시료채취를 거부해 그동안의 협상을 모두 무위로 돌린 바도 있다. 즉,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은 이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과 시간 끌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역시도 지금으로서는 우려보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게 사실이다. 애초에 남북정상회담의 지렛대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이나 경제적 지원 등 요구를 관철하려 할 것으로 예상됐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라는 핵심 의제로 스스로 직행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풍계리 핵 실험장의 폐쇄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먼저 꺼낸 카드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미국 정치의 상황이다. 미국 언론 보도에 의하면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의 교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존 켈리 비서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이”라 부르며 주한미군 전면철수 명령 등을 자신이 막아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은 존 켈리 비서실장이 비어있는 보훈장관직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백악관의 혼란이 가중될 경우 그렇잖아도 ‘트럼프 리스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국 내 여론이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

중동 문제 역시 여전히 변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달 30일 이란이 2015년 핵 합의에 서명하기 전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즉각 “내 말이 100% 옳았다”며 이란 핵 합의 파기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란 핵 합의가 말 그대로 ‘파기’되고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손을 잡는 형태의 중동분쟁이 심화된다면 북한이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맞바꾼다는 자신들의 계획에 다시 의구심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최후를 맞았던 것처럼 체제 불안이 실제적 위기로 나타났을 때 강대국들의 체제보장 약속이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살얼음을 걷듯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란 핵 합의 파기는 트럼프 행정부 뿐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공화당 매파의 주장이다. 이들이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일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미국 정치는 이런 실제적 조건들이 아니라 ‘트럼프 리스크’에 모든 책임을 지울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트럼프리스크’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이 점이 가장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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