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특수로 인해 고무줄 편성이 되듯 방송이 되지 않았던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 여섯 번째 이야기가 방송되었습니다. 이보희의 색다른 면을 발견하게 해주었던 '이유'는 인생을 살아가며 경험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야기를 두 여자를 등장시켜 매력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우리에겐 이유만 있을 뿐 영원히 선택은 힘들다

1. 무한루트에 빠져버린 삶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남편과 무표정한 표정으로 간호하는 부인. 호들갑스럽게 돕겠다고 나서는 시누이 부부는 소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오빠에 대한 걱정보다는 영국으로 유학 보낸 딸아이의 학비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자식 없는 언니가 딸 같은 조카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에도 지수(이보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그녀는 웃음을 잃고 살아갑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얇은 웃음 한번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거대한 집과 삶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집안에 새로운 간병사가 들어오게 됩니다. 어린 듯 보이는 송이라는 여자는 조금은 미스터리합니다. 소개소에서 보내지도 않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그녀는 가끔씩 누워있는 지수의 남편에게 살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적막하고 마치 무덤 같았던 지수의 집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항상 두꺼운 커튼으로 모든 빛을 차단하고 무의미하게 지내던 그의 집에 새로운 금붕어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합니다. 아침마다 지수의 냉장고에는 전날 송이가 만들어 놓은 샌드위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 노력들에도 지수는 샌드위치를 그냥 휴지통에 버리고 자신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사다 놓은 금붕어에 대해 타박을 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무한 루트에 빠져 되돌이표처럼 똑같은 공식만 되풀이되는 컴퓨터가 말썽입니다. 학과장은 자신에게 외국으로 교환교수로 나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묻고 동료 교수는 너무 가깝게 다가옵니다. 모든 것이 무겁게 다가오는 상황에 시누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 같다고 가출을 해 자신의 집에 들어옵니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싫었던 지수이지만 메몰 차게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 술에 취한 시누이의 투정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여간 못 마땅한 게 아니지요. 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의외의 상황이 놀랍기만 합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난리가 날 듯했던 시누이가 웃으며 집으로 향하는 것 아닙니까.

송이가 오해를 풀어준 덕분에 혹 같았던 시누이를 떨쳐 낼 수 있었죠. 그렇게 송이는 조금씩 지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심부름으로 지수의 학교를 찾은 송이는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하고, 병원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기 위해서는 구급차가 필요한데 사고 이후 방치해둔 자가용을 직접 운전해 가는 송이가 일방적이라 밉기도 하지만 결코 싫지는 않습니다.

모든 감정들을 막아두고 살아왔던 그녀에게 송이는 운전은 자유롭게 할 수 있기에 운전을 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송이에게 운전을 배우고 비로소 자유를 찾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존재가 되지요. 그렇게 자신에게 새로운 가치를 심어주기 시작한 송이를 위해 과외를 해줍니다.

대학을 가지 못한 송이가 학교에 가면 이런 저런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지수는 들어주고 싶었어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하게 만들어준 송이를 돕고 싶었죠.

지수는 우연히 병원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송이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송이는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는 척수가 천천히 굳어가는 병으로 병원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이는 저녁 9시까지 근무를 자청한 이유도 누워있는 그 남자를 간병하기 위함이었죠.

그렇게 서로 비슷한 처지였던 두 여인은 하나가 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동일한 상황에 처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 송이와 그녀를 통해 자신을 깨닫게 된 지수는 서로에게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2. 단편이 주는 매혹적인 얼개들

단편이기에 가능한 구조는 극적인 재미를 돋우는 역할을 해줍니다. 사랑이 아니라 억압된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했던 결혼은 지수에게 무의미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사랑 없는 삶은 당연히 남편에게도 무미건조할 뿐이었고 그런 건조한 그들의 삶은 불륜을 조장하게 되었죠.

이혼을 요구해도 결코 들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의도적인 불륜을 저지른 지수는 그 일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남편에게 사죄를 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죠. 송이 역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병이 유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에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했습니다.

그 일 이후 그의 병은 악화되어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송이는 자신 때문에 그가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닐까란 죄책감에 사로잡혀 병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여자는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을 혹독하게 단죄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무한루트에 빠진 컴퓨터는 그녀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은유였습니다. 송이가 사다 놓은 금붕어 역시 그녀들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작용하지요. 바닷가에 간 그녀들의 대화를 통해 충분히 읽을 수 있는데요. "금붕어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송이의 말에 지수는 "바다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요.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떠날 수 있다는 송이의 말처럼 지수는 사랑 없이 살았던 30년간의 삶을 정리하고 영국으로 떠납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숨진 남편은 그녀에게 이젠 더 이상 마음의 죄를 담고 살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지요. 그렇게 자유로워진 지수는 송이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합니다.

자신과 함께 한다면 송이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다고 하지만 송이는 끝내 공항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사랑을 감싸고 있을 뿐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이유'만 찾을 뿐 영원히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극 중 지수의 말처럼 우린 수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선뜻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수많은 이유들만 끊임없이 생산해 낼 뿐 선택을 할 만큼 용기를 내지도 못한 채 살아갈 뿐이지요.

<드라마 스페셜-이유>는 두 여자를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지금 무슨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 수많은 이유들 중 무엇을 선택했는지, 혹은 선택하려 하는지 말이지요.

미스터리 방식을 통해 긴박감을 주며 단순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긴장감 넘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더욱 과거 이보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도 최근 이보희를 떠올리는 시청자들에게도 <이유>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색다르게 다가왔을 듯합니다.

단막극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지요. 짧은 이야기 속에 함축적인 의미들이 배치되고 그런 은유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극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방식은 단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더불어 기존 드라마에서는 느끼기 힘든 배우들의 변신과 다양한 배우들의 열연도 단막극의 재미를 배가 시켜주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탁월한 감각과 이야기로 풀어낸 <이유>는 막장이 판치는 드라마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같았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