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6일, 잠실 학생체육관.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대학팀 우승을 달성한 연세대의 주장이자 졸업반이었던 문경은은 함께 뛴 후배들인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석주일, 김훈 등의 헹가래를 받으면서 화려했던 대학시절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람보슈터' 문경은의 앞길에는 꽃길만 놓일 것처럼 보였다. 1990년대 초반 문경은의 등장은 슈터의 고정관념을 깨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충희 (183cm), 김현준 (182cm), 최철권 (180cm) 등 화려한 슛감각을 자랑하는 전문 슈터들의 신장은 대부분 180cm대 초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센터를 맡기도 했던 문경은은 연세대에 입학 후 최희암 감독의 집중 조련을 통해 전문 슈터로 거듭났고 190cm의 높은 신장을 활용하여 상대 수비수들의 혼을 빼는 폭발적인 슛감각을 과시하였다.

문경은의 등장과 더불어 연세대는 당시 졸업반이었던 정재근, 이상범(현 DB감독), 오성식 등과 함께 대학농구 돌풍의 서막을 열기 시작했다. 1991 농구대잔치부터 연세대는 실업팀을 위협하는 강호로 급부상했다. 정재근, 이상범, 오성식의 졸업 이후 문경은을 기점으로 뒤이어 입학한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석주일 그리고 공룡센터 서장훈 등이 가세한 연세대는 1993-1994 농구대잔치에서 완전체의 전력을 과시하게 된다.

문경은은 1993-1994 농구대잔치에서 팀의 우승과 더불어 총 613점을 넣으며 득점왕에 등극한다. 졸업을 앞두고 당시 실업농구 최대 라이벌이었던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간에 치열한 스카우트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문경은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5억원의 계약금에 삼성전자 행을 선택한다.

당시 삼성전자에는 이충희 은퇴 이후 독보적인 전문 슈터로 군림하던 '전자슈터' 김현준이 팀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위치에서든 기가 막힌 슛 감각으로 득점을 양산해내는 김현준은 문경은의 광신상고 - 연세대 직속 선배이기도 했다.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 서울 SK와 원주 DB의 경기에서 문경은 SK 감독이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현준, 문경은의 조합은 삼성전자 팬들에게는 큰 설렘을 안겨다 주었다. 1987-1988 농구대잔치 우승 이후 매번 기아자동차의 벽에 막히고, 심지어는 라이벌 현대전자에 가로 막혀 우승을 놓치던 삼성전자는 김현준과 더불어 문경은이 쌍포 역할을 맡아주면 우승까지 노려볼만 하다는 기대에 부풀게 된다.

그러나 1994-1995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 유니폼을 입은 문경은은 독수리 유니폼을 입었던 당시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나친 기대에 따른 부담감이었을까. 김현준과의 시너지보다는 오히려 엇박자가 발생하면서 좀처럼 기대한 효과가 드러나지 못했다. 상위권은커녕 대학시절 자신보다 지명도가 낮았던 명지대 출신의 전문슈터 조성원이 가세한 현대전자에게 완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결국 삼성전자는 8위에 가까스로 턱걸이하며 플레이오프에서 1위 연세대와 8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당시 연세대와의 8강 플레이오프는 문경은의 선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불상사로 얼룩지게 된다. 2차전부터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이 펼쳐지더니 결국 3차전에서 서장훈이 리바운드 다툼 과정에서 삼성전자 센터 박상관의 팔꿈치에 뒷목을 가격당하며 의식을 잃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서장훈은 은퇴 할 때까지 줄곧 목에 보호대를 차고 경기에 임해야 했다.)

1993-1994 농구대잔치에 이어 예선리그에서 무패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하던 연세대는 결국 8강에서 삼성전자에 덜미를 잡히게 된다. 당시 농구장을 가득 메운 오빠부대 팬들의 아쉬움과 분노 그리고 허탈함에 가득 찬 함성은 처절하게 울려 펴졌다. 삼성전자는 이기고도 찬사를 받지 못했고 불과 1년 전까지 동고동락하던 후배들이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문경은도 본의 아니게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전자는 1994-1995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했지만 기아자동차 허재의 신들린 원맨쇼에 결국 1승 3패로 물러나게 된다. 마지막 4차전은 모처럼 삼성전자 구단과 팬들이 갈망하던 김현준- 문경은 쌍포가 가동했지만 허재의 원맨쇼는 도저히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폭발했다.

1994-1995 농구대잔치 준우승 이후, 문경은은 상무에 입대하여 이상민, 조성원, 홍사붕, 김승기 등과 함께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렸지만 또 다시 기아자동차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농구대잔치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97년 12월 프로농구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문경은의 소속팀 삼성 썬더스는 프로농구 출범 첫 해 최하위에 머무른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중 문경은은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주던 선배이자 멘토였던 김현준 코치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이후 2년 후인 2001년 소속팀 삼성 썬더스는 농구대잔치 시절을 포함하면 1988년 이후 13년 만에 정상에 오르게 된다. 문경은 본인으로서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처음 맛보는 우승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의 맛은 연세대 시절과는 한층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삼성 썬더스 전력의 중심은 문경은이 아닌 주희정이 자리하고 있었고, 주희정을 중심으로 당시 최고 용병 테크니션이었던 아티머스 맥클레리, 우직한 센터 무스타파 호프, 그리고 이규섭 등이 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문경은의 비중은 입단 시절에 비하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남자 프로농구 SK 나이츠 문경은 감독이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 서울 SK와 원주 DB의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두 팔을 벌려 관중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우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경은은 시즌 종료 후 SK 빅스로 트레이드되는데 당시 트레이드 맞상대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대학 후배 우지원이었다. SK 빅스 - 전자랜드를 거쳐 문경은은 2005 시즌부터 SK 나이츠 유니폼을 입게 된다. 프로 생활의 마지막 5년을 SK에서 보낸 문경은은 은퇴 후 2년 만에 신선우 전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대행에 오르게 된다.

너무 짧은 기간에 팀을 이끌게 되면서 우려의 시선도 많았지만 문경은은 특유의 형님 리더십으로 모래알 같던 팀의 조직력을 다진다. 그리고 유재학 감독과 가드 양동근의 운명적인 만남처럼 문경은 감독은 중앙대 출신의 가드 김선형이 입단하면서 팀 전력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김선형과 더불어 속공에 능하고 살림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전천후 용병 애런 헤인즈와의 만남은 문경은 감독 지도자 생활에 터닝포인트를 일구게 된다. 정식 감독 임명 이후 두 번째 시즌 만에 문경은 감독은 김선형, 헤인즈를 앞세워 팀을 정규시즌 1위에 올려놓고 챔피언 결정전(2012-2013 시즌)까지 거침없이 진출한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 자신의 연세대 선배인 유재학 감독의 능수능란한 수읽기에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4연패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문경은 감독의 SK는 기복이 심한 행보를 반복했고, 우승을 위해 헤인즈와 결별하는 선택마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문경은 감독은 졸지에 헤인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감독이라는 오명마저 얻게 된다.

문경은 감독은 '문애런'이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을 앞두고 헤인즈를 다시 영입한다. 하지만 올 시즌 초반 주전가드 김선형의 발목 부상이라는 대형 악재가 터졌지만 문경은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 가용폭을 넓히면서 작전 가용 폭과 선수기용 범위를 넓히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6차전 서울 SK와 원주 DB의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SK 선수들이 문경은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선형 이후 최준용, 안영준, 이현석 등의 젊은 선수들을 연달아 주전급으로 키워내면서 문경은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감독 역량을 업그레이드시켜 나갔다.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선 팀 전력의 핵심인 헤인즈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지만 대체용병 메이스를 짧은 기간 사이에 융화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결국 그토록 바라던 챔피언 반지를 얻게 되었다.

24년 전 자신들의 후배들에게 우승 기념 헹가래를 받았던 잠실 학생 체육관에서 문경은은 이제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다시 우승의 중심에 서서 자신이 키워낸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기쁨을 누렸다. 우승 확정 직후 그가 흘리는 눈물 속에서 생각 외로 곡절이 심했던 그의 선수 시절 및 지도자 시절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지난 시즌 챔피언 안양 KGC 김승기 감독 또한 실업농구 삼성전자 입단 동기로서 많은 활약을 기대 받았으나 아쉽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현역을 은퇴하였다. 김승기 감독에 이어 문경은 감독까지 실업농구 삼성전자 입단 동기들의 우승에 대한 '한'이 서서히 풀리는 듯싶다. 문경은 감독의 우승 장면을 보면서 아마도 하늘에 있는 고 김현준 선배도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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