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김지훈>, <79년생 정대현>. 모두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대항마를 표방하고 나선 이야기다. 이들은 공통으로 <82년생 김지영>이 너무 여성 편향적이라고 주장한다. 남성의 고통 없이 여성의 고통만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된 현실이며, 남녀 편 가르기만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성적 고통 서사’는 성공할 수 있을까?

여성적 고통 서사: 경험적, 통계적, 이론적 뒷받침

성공한 여성적 고통 서사인 <82년생 김지영>부터 살펴보자. 우선 <82년생 김지영>의 가장 큰 서술적 특징은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까울 정도로, 이야기 사이사이에 통계를 배치한 점이다. 이 통계는 주인공 김지영이 겪는 부당한 상황마다 그것이 여성 일반의 현상임을 증명한다. 또 소설 속 통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이러한 자료를 분석한 논문과 이론이 방대하다. 즉 여성적 고통 서사는 경험적, 통계적, 이론적으로 뒷받침되는 리얼리즘 서사다. <82년생 김지영>의 막대한 판매 부수가 이를 방증한다.

물론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삶의 피해자성과 통속성만 강조한다는 한계 때문에 온전히 성공한 서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꼼꼼히 제시된 통계 때문에, 이 이야기를 피해망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에 남성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주제를 흐리는 일이다. 굳이 흑인의 고통에 대고 백인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흑인이 받는 핍박을 이야기한다고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조장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은폐된 고통을 드러내야, 동등하게 관계 맺을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 자체가 남녀 갈등을 조장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다.

남성적 고통 서사: 기득권과 역차별

이제 남성적 고통 서사를 살펴보자. 여성적 고통 서사에 대항하는 남성적 고통 서사는 크게 두 가지다. 남성만이 겪는 고충을 강조하거나, 역차별로 인한 피해를 강조하는 식이다. 전자는 일종의 ‘가부장적 고통’이며, 과도하게 이해받아온 고통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아내를 때리거나 룸살롱에 가는 남편·아버지의 고뇌를 다룬 문학작품, 성욕을 주체 못 해서 성폭력을 저지르고 마는 남성 존재에 대한 연민의 정서, 여아감별 낙태로 인해 불균형해진 성비와 육아 부담으로 인해 낮아진 결혼율임에도 남성의 처지만을 걱정하는 언론 등등.

가부장적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부장적 고통은 기득권의 고통이기에 약자의 것보다 훨씬 많이 거론되며, 약자의 것보다 빈약할 수밖에 없다. 자기객관화가 안 된 고통의 전시는 유아적이고 볼썽사납기 쉽다. 성폭력 무고죄 비율이 0.5% 미만(일반 범죄는 2%)인데도 무고로 인한 피해를 부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자가 군중 속의 고독을 이야기하면 비웃음을 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얄팍함은 <90년생 김지훈>과 <79년생 정대현> 모두 남성의 피해 자체보다, 여성이 얻는 이득을 긁어모아 전시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역차별적 고통’은 어떤가? 역차별은 차별을 전제한다. 여성이 동등한 시민으로 여겨지면 성 역할이 흐릿해져 여성 고위직 비율도 높아지는 동시에 힘든 일도 함께 분담하게 될 것이다. 임금 격차가 같아지면 데이트 비용과 결혼식 비용도 같아질 것이다. 여성의 외모를 제일 가치로 보는 경향이 줄어든다면 예쁘다고 먼저 편의를 봐주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군대와 체벌에서의 역차별은, 여성과 함께 그것을 행하는 권력(국가, 교권)에 대한 저항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다. 역차별을 풀려면 차별 자체를 해소해야 한다.

고통의 경쟁화, 그 치졸함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은 공감 받고 <90년생 김지훈>이 비난 받는 본질은 치졸함이다. 겨우 꺼낸 고통에 내가 더 아프다며 고통을 경쟁화 하는 발상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녀 분란을 조장하는 쪽은 후자다.

물론 <90년생 김지훈>이든 <79년생 정대현>이든 못 나올 이유는 없다. 다만 나오기도, 읽히기도 힘들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나 페미니즘 서적이 봇물을 이루고, 각종 세미나와 강연이 성황을 이루는 것은 여성의 고통을 대변할 언어에 대한 갈증을 방증한다. 반면 남성적 고통에 대한 언어는 넘친다. 그래서 굳이 별 돈이 안 되는 책을 수고를 들여 창작할 열정도, 그것을 뒷받침할 통계적 자료도, 완성품을 절실하게 읽을 독자층도 별로 없어 보인다. <90년생 김지훈>은 프로젝트를 이어갈 사람을 찾다가 결국 엎어졌고, <79년생 정대현>은 한 장짜리 대자보에 불과했다. 작가 강혁민 씨가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해서 쓴다는 소설은 어떨까? 예감이 썩 좋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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