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혁명'이라는 게 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 D단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사람의 작품으로 제목까지 불온하기 짝이 없으니 당시에는 몰래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

은밀한 호기심으로 이 곡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곡을 '인터내셔널가'에 버금가는 이념 음악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감상하는 쪽이든 감시하는 쪽이든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는 뒷전이었다.

교향곡 5번, 스탈린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

30년대 소련.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 당한 공포 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 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관변 비평가들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곡은 초연 당시 무려 40분 동안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연주 시간 45분에 버금가는 긴 시간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의 의기투합?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가 완전히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1941년 완성한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대항하여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볼쇼이관현악단 멤버들을 불러 모아 이 곡을 연주했다. 평화를 호소한 이 음악회는 연합국 내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에 대한 저항 의지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장대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토벤의 9번이 그러했듯, 쇼스타코비치의 9번도 최대 걸작이 될 걸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귀엽고 유머가 넘치는 교향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즈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스탈린 1인 숭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저열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구체적인 회화나 조형물로 말하기 때문에 체제를 옹호했느냐 비판했느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음악, 특히 가사 없는 교향곡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판단하려고 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의 섬세함, 바로 그 점이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다.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시대’

▲ MBC 시사교양국 이채훈 PD ⓒMBC
그러나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포 정치 속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한-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에 의하면-교향곡 5번을 소련 공산당이 찬양한 것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더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레코드는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모스크바필하모닉이 녹음한 전집(멜로디아)을 일단 쇼스타코비치 해석의 준거틀로 볼 수 있다. 음질에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작곡가와 40년간 교류한 콘드라신의 해석이 갖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낱장으로 발매됐다. 그밖에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지휘의 레닌그라드필하모닉(1967년/Praga), 겐나지 로제스트벤 스키 지휘의 소련문화성교향악단(1984∼1987년/멜로디아) 등 소련 음악가들의 연주를 우선 듣는 게 순서일 것 같다.

※ 이 글은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의 관계를 통해서 그의 음악의 정치적 맥락을 살펴본 다큐멘터리 <쇼스타코비치의 저항> (캐나다 Rhombus와 독일 ZDF 공동 제작),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조국인 소련으로 되돌아가는 전 과정을 그린 CBS의 다큐멘터리 <음악의 전사들-로스트로포비치, 러시아로 돌아가다>의 내용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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