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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흉내지빠귀 새를 죽이려 하는가?[전규찬 칼럼]
전규찬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승인 2018.03.20 08:39

국내에 ‘앵무새 죽이기’로 잘못 번역된 소설책이 있다. 90년대 이후 나온 몇 편의 번역본이 모두 같은 제목이다.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어감도 좋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퓰리처 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성 소설가 하퍼 리(Harper Lee)가 1961년에 쓴 원작 『To Kill a Mockingbird』를 이상하게 옮겨 놓았다. Mockingbird. 정확히 말하면, 흉내지빠귀다. 그래서 책 제목도, 정확하게는, ‘흉내지빠귀 죽이기’로 옮기는 게 맞다.

흉내지빠귀. 북미의 고유한 참새목 새들에 속한다. 주로 미국 남부 지방에 서식하는데, 다른 새들은 물론이고 곤충이나 양서류의 소리도 곧잘 흉내 내는 게 주특기다. 이웃에게 별 해 끼치지 않으면서, 맨날 남들의 소리를 따라 읊어대는 착한 무해조류가 되겠다. 보통 뉴질랜드, 태평양 등 열대지방의 섬에 서식하는, 앵무목 앵무과 수백여 종 앵무새들과는 한 마디로 종자가 다른 새다.

이게 글의 핵심은 아니다. 미투 운동이 한참인 지금, 다시 원작을 읽으며 궁금해진 것은, 작가가 왜 소설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흉내 내기 좋아하는 지빠귀 새 죽이기. 우선 아주 간단하게만 듬성듬성, 작가가 어린 시절 이웃마을에서 일어난 실제사건에서 모티브 얻었다는 소설의 배경과 내용을 짚어보자. 

소설 『앵무새 죽이기』 표지사진 (저자 하퍼 리, 역자 김욱동, 열린책들)

때는 1930년대. 미명의 앨라배마 한 조그만 마을이 무대다.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치면서도 용기와 정의감도 두루 갖춘 오빠 젬(Jem)과 왈가닥 천방지축인 여동생 스타우트(Scout)가 변호사 아버지를 편히 친구처럼 ‘핀치(Finch)’라 부르며 살고 있다. 소설은 세상물정 모른 채 살아가던 두 꼬마가 세상의 모순과 이치를 깨달아 가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한편, 두 주인공의 아버지 핀치는 마을 주변부에 사는 ‘백인’ 여인 강간범으로 몰린 한 ‘흑인’ 청년의 변호를 맡아 바쁘다. 오직 진실만을 추구한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주변 이웃들의 시선이 급속히 차가워진다. 그를 대놓고 ‘검둥이 애인(nigger lover)'이라 부르는 사람도 생긴다. 그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핀치는 묵묵히 자신의 소명에 열중한다. 오직 정의를 위해서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다. 로빈슨(Robinson)은 절대 범인이 아니다. 부정한 음모와 비겁한 거짓말, 차별적 인종주의의 억울한 피해자일 뿐이다. 법 바깥에 있는 소수자, 약자다. 그 불안한 생명을 그는 법의 울타리 속에서 지켜주고 법정의의 이름으로 구해내고 싶다. 그는 그게 그에게 맡겨진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운명임을 잘 알며, 순진한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깊이 신뢰한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거야. 

마을 사람들이 가득 들어선 법정에서, 핀치가 피해 여성인 마엘라(Mayella)에게 묻는다. 누가 범인입니까? 진짜 가해자는 누구입니까? 당신을 학대하고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자는 정말 이 중에 누구인 거죠? 

그녀를 고통에 빠트리는 질문을 마친 핀치는 과녁을 그녀의 아버지 밥(Bob)에게 휙 돌린다. 술주정뱅이 그를 가정 내 성폭력을 일삼아 온 악덕한 인간으로, 무고한 로빈슨을 죄인으로 몰아간 비겁한 장본인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고발한다. 그가 가정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의 딸을 겁박해, 로빈슨을 범인으로 몰고 있다고 추궁한다. 배심원들은 이 진실에 기초해 정의롭게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흉내지빠귀. 이런 중요하고 골치 아픈 사건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와중이다. 어느 날, 핀치는 조르고 조르던 열 살짜리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 한 자루를 사준다. 한때 명사수이기도 한 자신은 절대로 총을 손에 잡지도 않을 것이며 그걸 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얘들아, 숲 속 다른 새들은 쏴도 괜찮아. 그런데 흉내지빠귀는 절대로 죽이면 안 돼.’

무슨 뜻일까? 무슨 의미인가? 왜 흉내지빠귀 새는 죽이면 안 되는 건가? 주변에 어떤 사냥감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냥하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새니까? 그 소리신호를 없애버리면 숲 속 새 사냥이 힘들어진다는 명사수 아빠의 유용한 팁인가? 아니, 그냥, 착한 새니까? 궁금하다. 왜 작가는 이 중요한 대목에서 갑자기 저런 사소한 이야기로 빠지는가? 왜 그 주변부적 에피소드로 책의 제목을 뽑았을까? 무엇을 말하기 위함이지?

Mock. 우리말로 ‘가짜의’, ‘조롱하다’의 뜻을 갖는다. 그래서 직역하면, Mockingbird는 숲 속 다른 새나 벌레의 울음을 따라하며 조롱기 가짜 흉내를 내는 새 정도가 된다. 왜 그런 새를 죽이면 안 되는 것인가? 왜 그 메시지를, 아빠는, 총을 선물해준, 자신의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강조한 걸까?

재미나게 이어지던 책 읽기는 이 질문에서 큰 고비와 맞닥뜨린다. 번역의 오류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한, 어려운 질문이다. 풀지 않고서는 독서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기호학적으로 던져진 상징기호를 풀이해 본다. 혹, 흉내지빠귀는 이웃의 소리를 흉내 내 옮기면서 그 존재를 알리고 실체를 지시하는, 실상을 표시하고 진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자-새가 아닐까? 일종의 기호, 소중한 텍스트, 중요한 의미의 담지자-인간이 아닐까? 그 의미를 인간사회로 가져오면, 흉내지빠귀는 주변 동향의 실태를 반사하는 목소리, 세계와 사회의 실상을 반영하는 입. 부정한 상황의 흐름을 징후로서 드러내는 인물. 은폐된 사실과 유기된 진실을 불가피하게 현상하는 사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실제의 미메시스, 실체 재현의 주체.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유의미한 커뮤니케이션 채널, 상징적 교통 신호. 이렇게 흉내지빠귀의 의미를 읽어낼 순 없을까? 그래서, 소설 속 죽은 로빈슨이 인종주의 사회를 옮기는 흉내지빠귀가 되고, 그를 구하고자 나섰지만 실패한 핀치 변호사가 부정한 체제를 전하는 또 다른 흉내지빠귀가 되며,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아이가 또 절망적 역사를 말하는 흉내지빠귀가 되는 게 아닌가? 

'앵무새 죽이기' 작가 하퍼 리(AP=연합뉴스)

그렇게 풀면, 이런 질문이 바로 이어진다. 그럼 소설 바깥의 현실에서는 지금 또 누가 죽여서는 안 되는 흉내지빠귀의 운명을 맡고 있는가? 누가 바로 지금 흉내지빠귀-인간의 입을 틀어막고 진실까지 감추려 위협 중인가? 진상이 드러나지 않길 원하는 어떤 권력들이 인간-흉내지빠귀를 말로써, 언어를 무기로 삼아 겨냥하는가? 순진하게, 혹은 용감하게 세계의 비정과 부정, 야만과 야수성까지도 소리로 따라하고 글로 옮기는 흉내지빠귀 죽이기. 

작가 하퍼는 이런 현실이 30년대 미국 남부는 물론이고 21세기 인간의 숲 어디에서도 절대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흉내지빠귀 죽이지 말기’를 표제로 박은 게 아닐까? 변호사 핀치를 허구의 프락치로 내세운 것 아닌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짧게 소설의 결말을 요약하자. 핀치의 감동적이고 열성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피의자에게 전원일치 유죄를 선고한다. 앨라배마 그 최 남부지방에서 ‘흑인’의 ‘백인’ 강간은 곧 사형을 뜻한다. 법정의가 무너진다. 좌절한 ‘흑인’ 청년 로빈슨은 구치소로부터 도망치다 담을 넘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는다. 

공동체는 다시 부정(不正)의 침묵으로 들어간다. 세상은 아버지의 기대와 아이들의 소망과 달리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정말 그러한가? 자신을 욕보였다면서 핀치에게 보복하겠다던 밥이 어느 캄캄한 날 밤 집으로 돌아가던 무고한 젬과 스타우트를 칼로 위해한다. 그 어둠 속 위급상황에서 누군가 은밀히 나타나 두 아이를 구해주며, 밥은 다음날 가슴 깊이 푹 칼이 찔린 채 절명한 상태로 발견될 것이다.

밥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마을의 보안관은 왜 밥이 스스로 넘어져 자기 칼에 찔린 게 진실이며 모든 건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나서는가?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라. 과거 허구의 픽션이지만, 현실 세계 속 당신을 바로 지금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지금 한참 용감히 싸움 중인 인간-흉내지빠귀들을 마음에 두고 썼음을 밝힌다. 정의를 위해 고통스럽게 행동하는 흉내지빠귀-저널리스트들에게 부족하지만 바친다. 인간들의 어두운 숲속을 진동하는 온갖 야만과 폭력의 비명, 불안과 비정의 음성, 슬픔과 분노의 소리를 전하는 흉내지빠귀-진상의 전달자를 죽이려 들지 마라.

전규찬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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