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특사단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특사단은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6개 항의 합의를 이뤄냈다. 4월 말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이전에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해 첫 통화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고 북미대화를 원한다는 점 역시 명확히 밝혔으며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을 중단하겠다고도 했다.

대북 특사단이 성과를 거두지 못해 어렵게 열린 대화 국면이 닫힐 수 있다는 우려는 일단 불식됐다. 가장 큰 성과는 어쨌든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원론적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히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이를 두고 북한의 입장은 변한 것이 없으며 시간을 벌려는 술수로 보이기 때문에 이 정도 언급으로는 미국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해석을 제기하고 있으나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대목에서 북미간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38선 이북으로의 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4NO원칙’을 반복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비롯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을 계속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 발언 등으로 이에 응수하면서 미국의 태도는 급진화 됐다. 얼마 전 연두교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탈북자 출신 인사까지 조명을 받도록 한 것은 정권교체나 붕괴 시도를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질만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까지 ‘4NO원칙’을 공식적으로 철회한 바는 없다.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걸로 알려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역시 지속적인 교체설에 시달리면서도 지금까지 직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의미있는 태도의 변화를 예고한다면 미국 역시도 ‘4NO원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번에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에 대해선 북미가 표면적으로나마 최소한의 합의를 이룰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면적 합의’에 이르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당장 제기된 위협은 패럴림픽이 끝나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재개되는 시점에 놓여 있다. 특사단의 방북 이전까지 우려됐던 것은 한미군사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군사도발을 재개해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그런데 김정은은 바로 이 대목에 대해서 “올해 4월 훈련을 예년 수준으로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했다고 한다.

‘예년 수준’이라는 것은 핵항모, 핵잠수함, 핵미사일 운반이 가능한 폭격기 등 전략자산의 동원 규모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난해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시기에 참가 미군 병력과 전략자산의 축소가 이미 이뤄졌다. 따라서 김정은의 발언은 한미군사훈련의 규모가 지난해 수준에서 유지된다면 북한도 군사도발로 훈련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남한 정부와 미군 입장에서 보자면 한미군사훈련의 추가 연기나 축소를 논의해야 하는 부담이 없어진 것이다.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지난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청와대)

물론 북한의 이러한 태도 변화를 과연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1차적인 대화 테이블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이 다소 유연한 태도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 가능성 있는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진지한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은 어느 방향이 됐든 열심히 갈 준비가 돼 있다”고 썼다. 또 보도에 의하면 공화당 주요 인사들도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경우처럼 여전히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인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달라진 기류가 감지되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미국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추가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대북 특사단이 “미국에 전달할 북한 입장을 별도로 추가로 갖고 있다”고 밝힌 바를 보면 이 역시도 고려 범위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단 예상할 수 있는 건 북한에 억류돼있는 미국인 인질 3명의 석방 문제이다. 북한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한다면 북미대화를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히려 우려가 남는 점은 남북정상회담이 ‘4월 말’이라는 일정이 확정된 상태로 다소 조기에 추진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패럴림픽 이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애초 ‘성과’가 분명한 상태에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던 남북정상회담이 일종의 ‘카드’로서 소비되는 느낌이 있다. 지금까지는 대통령 임기 중에 2회 이상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사례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가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추가 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다소 모험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선 남북정상회담이 이번 한 번만 이뤄지는 게 아닐 가능성이 추후에 확인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주의 깊게 볼 대목은 이번 정상회담의 장소가 판문점 평화의집이라는 사실이다. 조건을 볼 때 평화의집에서 이뤄지는 정상회담은 외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실무적인 측면에 치우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후에 좀 더 확장된 의미를 가진 형태의 정상회담을 가정해본다면 그것은 평양이나 서울에서 열려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을 ‘정상국가’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게 언론의 분석인데, 현안을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 또한 ‘정상국가’들이 갖고 있는 외교적 문법이라는 점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