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 이후, 남초 커뮤니티에서 ‘(서 검사가) 예쁘네. 건드릴 만 하네’ 와 ‘안 예쁜데? 왜 건드렸지?’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극과 극의 반응이지만 공통점은 성폭력을 ‘겪을 만한가’ 여부를 피해자가 ‘예쁜가’로 본다는 점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류여해 최고위원이 그에게서 성희롱을 겪었다는 폭로에 대해 “36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여성 스캔들이 없었던 것도 내 각시보다 나은 여성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듯, ‘이성적 호감’은 성폭력의 주된 변명이다.

남초커뮤니티 캡처(연합뉴스)

하지만 당연하게도, 호감 있다고 성폭력을 저지르면 안 된다. 또 호감이 없어도 성폭력은 일어난다. ‘강간범도 네 얼굴 보고 도망간다’라는 말은 성폭력의 본질이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임을 간과한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예뻐서 그랬다’던가 ‘여자로 안 본다’며 ‘성적 의도’를 따지느라 바쁘다. 그런데 ‘예뻐서 그랬다’는 변명은 매우 흔하면서도, 매우 제한적으로 쓰인다. 세 가지 가정을 통해 그 변명의 진의를 발라보자.

예뻐서 그럴 만했다, 단 사모님·딸·남자는 빼고

우선 ‘사모님이 예뻐서 그럴만 했다’란 말은 거의 안 나온다. 이유는? 사장님, 그러니까 윗사람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선배가 예뻐서’라고도 잘 안 한다. 바꿔 말해 ‘예뻐서 그랬다’는 아랫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성폭력은 권력의 눈치를 본다.

반대로 ‘내 딸이 예뻐서 그럴만 하다’라는 말도 안 나온다. 우리 사회에 강력하게 깔린 근친상간 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딸이 아니면 누군가의 딸이다. 즉 ‘남 딸이 예뻐서는 그럴만 하다’라는 적나라한 속내다. ‘예뻐서 그랬다’는 가족 외 사람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성폭력도 잦다는 점에서(그리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성폭력보다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성폭력은 가부장 권력의 눈치를 본다.

마지막으로 ‘잘생겨서 그럴 만하다’라는 말도 드물다. 성폭력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멋대로 침해하는 권력의 문제고, 그 성폭력을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이 겪는 것은 권력이 남성 일반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여초 직장인 교사집단에서도 교장, 교감은 남성투성이인 것이 대표적 사례다. ‘예뻐서 그랬다’는 여성의 예쁨에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결국 ‘예뻐서 그랬다’는 가부장 권력의 변명이다.

‘예뻐서 반했다’와 ‘예뻐서 만졌다’

그런데 ‘예쁘다’는 남성의 흔한 작업 멘트다. ‘예쁨’은 많은 여성이 듣고 싶어하고, 얻으려 분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권력을 쥔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는 최우선 기준이 ‘예쁨’, 즉 성적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자존감은 주로 ‘예쁨’에 있고, 남성은 그 ‘예쁨’을 인정해주는 자이다. 결국 ‘예뻐서 반했다’ 와 ‘예뻐서 만졌다’가 동시에 가능한 것은 작업과 성폭력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일뿐더러, 가부장제가 성적 권력까지 쥐고 있다는 방증이다.

영화 아름답다 포스터

영화 <아름답다>의 교훈

전재홍 감독의 영화 <아름답다>에서는 아름다운 여성 ‘은영’이 주인공이다. 은영은 남성들의 관심과 여성들의 질투에 시달리던 중 한 스토커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 스토커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어요”라며 변명한다. 은영을 보호한다는 경찰조차 스토커의 강간 불법 촬영 영상을 보고 수음을 한다. 은영은 자신의 불행이 아름다움 때문이라 생각하고, 못생겨지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한다. 아주 살찌우거나, 아주 삐쩍 마르려 하면서.

결국 은영은 미쳐 죽는다. 영화의 마지막, 부검의 보조조차 은영의 시신을 보고 “이렇게 아름다운 시체는 처음 봤어요”라며 피해자를 대상화한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서 검사의 폭로를 무시하고 외모를 평가했듯이. 은영의 스토커는 “당신의 아름다움이 날 먼저 강간했어요”라고 말한다. 추한가? 그렇다. 자신의 잘못을 아름다움에 묻어가려는 자들,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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