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2017년 미디어계 최고의 키워드로 ‘가짜뉴스’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2018년 들어서도, 이 단어는 여전히 시중에 범람한다. 그만큼 현실이 심각한 까닭인가? 모두가 ‘가짜뉴스’를 떠들고, 모두가 나서 ‘가짜뉴스’를 비난하며, 몽땅 나서 ‘가짜뉴스’ 퇴치를 주창한다.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소위 ‘가짜뉴스’를 고발한다. ‘가짜뉴스’에 관한 한 국가권력과 시민사회는 사실상 한목소리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건 ‘가짜뉴스’일 뿐이야. 그러면 모든 건 깔끔히 정리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가짜뉴스’는 여전히 기의가 불투명한 기표다. 무슨 의미인지 정의되지 않은 채 유통되는 상투적 기호다. 개념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전형적 통념. 그러하니, 지금 당장, 최남수 YTN 사장이 <미디어오늘> 등의 기자를 언론중재위에 제소할 때도, ‘가짜뉴스’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이용된다. “악의적 '가짜뉴스'의 배후를 철저하게 밝히고 책임을 추궁하겠다.”

지난 1월 10일 오전 최남수 YTN사장이 노조원들의 반대 속에 출근하는 모습. (사진제공=전국언론노조 와이티엔지부)

‘가짜뉴스’의 피해자 되기는 이렇듯 참 쉽다. 그건 일례가 아닌 상례다. 바로 직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자신으로부터 성희롱 당했다는 류여해 전 최고위원의 주장을 보도한 종편 MBN을 상대해서다. 사실의 뉴스와는 확연히 다르고, 의도치 않은 오보와도 많이 차이가 나는 ‘가짜뉴스’. ‘뉴스를 빙자한 정보조작과 선전비방’ 정도로 막연하고 포괄적으로 쓰이는 ‘가짜뉴스’. 그 피해자로 슬쩍 자신을 둔갑시켰다.

우리는 진실에 반하는, 정의롭지 않은 거짓의,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요. 제발 우리 선의의 피해자를 ‘가짜뉴스’부터 구해주시오. 그런 서사의 구조가 짜인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 두 사람을 ‘가짜뉴스’의 피해자로 보는 게 과연 맞나? 보다 근본적으로, 왜 저들은 ‘가짜뉴스’를 이렇게 들먹일까? 혹, 이들의 언어 전략은 ‘가짜뉴스’에 대한 우리의 통념, 즉 상투적 지식에 어필하려는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아닐까?

현실의 가짜뉴스가 진실을 심각하게 손상시키지만, ‘가짜뉴스’라는 언어가 거꾸로 진상을 이상하게 방해하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말의 오용이고 개념의 왜곡인가? 혹, 현재의 ‘가짜뉴스’는 그런 불투명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짜뉴스’라 찍고 하면, 모든 건 사실과 무관한 진실을 비트는 거짓이 되고 만다. ‘가짜뉴스’는 토론봉쇄의 전체주의적 효과를 내장한 지배적 언어로 성장했다. 거기에 피신해, 앞선 두 사람은 자신을 피해자로 전도시키고?

대체 ‘가짜뉴스’가 뭔가? 차이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 정의해 보자. 우선, 의도적인 가짜뉴스는 의도치 않은 오보가 아니다. 이울러, 사실과 다르고 사실을 고의로 비튼다는 점에서 사실을 지향하고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 팩트 뉴스의 윤리와도 구별된다. 그렇게 변별하고 나면, 가짜뉴스는 이렇게 정리 가능하다.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써, 의도적으로 진실을 가로막고 민의를 왜곡하며, 그럼으로써 대중들을 괴롭히는 반실체적 거짓말 보도, 거짓 정보의 유포.

이러한 점에서, 허위사실유포의 차원도 살짝 넘어서는 가짜뉴스는 (포스트)저널리즘의 양식으로 인정받아 온 본래의 페이크뉴스와도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페이크뉴스로부터 구별된다. 1980년대 중후반 미국 위스콘신에서는 유명한 종이신문 ‘어니언(Onion)’이 발행되고 있었다. 지역에서 발행되는 전국지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이 매체가 전하는 뉴스의 스타일과 내용. 가령 이런 식이다. 충격! 외계 비행물체, 골 빈 대통령 머리 위에 착륙.

그런 황당한 아이템,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대문짝만하게 일면 톱에 사진과 함께 내걸린다. 뭐야 싶어 들여다보다가, 사람들은 하하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끔은 씁쓸한 비웃음을 날린다. 아무튼 웃긴다. 그렇게 권력을 비웃고 독자들을 웃기려는 의도를 가진 ‘어니언’이 “미국 최고의 뉴스 소스”를 자처하며 내놓은 게 페이크뉴스다. 권력을 풍자하며 세태를 조롱하기 위해, 짐짓 진짜처럼 꾸며진 웃기는 허구의 뉴스 스토리다.

레이건 이후 국가 선전과 정보 조작, 뉴스 통제가 일상화된 상태에서, 젊은 저널리스트들은 주류 바깥에서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페이크뉴스라는 풍자적 프리즘을 새로운 세계해석의 장치로 개발해낸다. 허구의 스토리를 마치 뉴스인 양 내놓으며 기존질서 내 다양한 권력들을 조롱하는 놀이다. 장난이다. 그런 반정치적 의미, 반문화적 의의를 갖는 원래의 페이크뉴스는 철저히 주류적이고 제도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현재의 가짜뉴스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어니언>으로 대변되는 원래의 페이크뉴스도 의도한 허구라는 점에서 지금의 가짜뉴스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 형식적 특징과 스타일적 개성을 갖고, 페이크뉴스는 세계를 해석한다. 진상규명을 유도한다. 페이크가 곧 거짓은 아니다. 페이크뉴스는 사기, 기만이 아니다. 기존 뉴스의 룰을 넘어서는 하나의 (포스트)저널리즘이다. 반면, 오늘날 만연한 가짜뉴스는 사회이해를 방해하며 진실발견과 모순된다. 그럼으로써 낡은 반저널리즘의 선전에 머문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연합뉴스 자료사진)

사기다. 기만행위일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문제 삼고 시비할 부정한 가짜뉴스는, 진실과정의 대안적 실천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그러한 실험적 가치로서 존중받아야 할 페이크뉴스가 결코 아니다. 물론, 뒤섞여 마구 혼용됨으로써, 의미 차별화는 점점 힘들어진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비판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견지하는 게 옳다.

요컨대, 오보나 팩트 뉴스, 원래의 페이크뉴스, 심지어 허위사실유포와도 구별되는 가짜뉴스는 부정한 선전의 대중교통위반행위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기 위한 거짓 정보의 고의적 유통행위로서, 중대범죄 구성여부 판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엄밀히 개념 규정할 때만, 가짜뉴스는 정상정치와 여론정치, 민주정치의 ‘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악의적 담론조작·조작담론의 부정행위를 상대로 한 사회정의차원의 ‘전쟁’ 담론도 허용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명료해진 정의에 비춰, 세간의 무수히 쏟아지는 ‘가짜뉴스’ 논란을 실제적으로 재조명해 볼 것이다. 앞서 두 사람이 제기한 피해주장의 타당성도 비교적 쉽게 감별해낼 수 있다. 홍준표는 어떤 사실과 어긋나는 악의적 거짓보도의 피해를 MBN으로부터 당했는가? 최남수씨가 미디어비평지 등으로부터 입었다는 거짓된 정보유포, 사기, 기만의 피해는 뭔가? 가짜뉴스의 현실도 골치 아프지만, ‘가짜뉴스’의 주장도 심각하게 따져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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