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가 베토벤 바이러스 이후 줄곧 수목 드라마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고육책을 써오고 있다. 개인의 취향도 방영 전 타 채널과의 시작을 맞추기 위해 초미니 시리즈를 중간에 끼워 넣는 방식을 동원했다. 신성일, 하희라 주연의 '나는 별 일 없이 산다'에 이어 곧바로 편성된 백성현, 박민영 주연의 '런닝 구' 역시 MBC의 야심작 로드넘버원의 대기 작품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런닝 구는 결코 로드넘버원 땜빵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첫 회를 보고나서는 4부작인 것이 아쉬움부터 생길 정도로 흡입력을 보였다. 런닝 구가 다루는 소재는 가슴 아리면서도 조금 잔인한 면도 있지만 그것은 평범하지 않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적은 예산으로 만들었을 이 드라마는 항상 달리지만 달릴 수 없는 트라우마를 지닌 구대구(백성현)와 이미 마라톤 유망주로 부상한 부랄친구 허지만(유연석)의 오랜 경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경쟁을 지켜보는 어릴적 친구 문행주(박민영)가 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구대구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고자 신발끈을 묶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느새 나타난 아버지는 극구 아들을 말리려든다. 대회 진행 측에서 아버지를 떼어 말리고 대구는 달리기 시작한다. 42.195km 구간을 달리려는 것이 아니라 "30km만 뛰자. 30km만..."하고 속으로 다짐, 또 다짐을 한다. 대구는 달리고 싶지 않지만 달려야 했고, 달리지만 끝까지 달려서도 안됐다.
선두에서 같이 달리는 마라톤 유망주 지만과 그를 우승시키기 위해 경쟁자를 견제용 선수로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대구는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이기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치솟는다. 그런 순간 화면은 대구, 대우 형제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동생이면서 형을 항상 돌봐야 하는 대구는 형만 챙기는 아빠에게 불만이 있다. 전체적으로 참 슬픈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슬픔을 정작 극대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수채화같이 맑은 화면에 담긴 싱그러운 모습들이다.
그러나 그런 임무를 충실히 하기에 대구는 너무 어렸다. 더군다나 이쁜 행주에게 주고픈 1등 선물도 있거니와 그러기 위해서는 달리기에서도, 행주에 대해서도 경쟁자인 지만을 이겨야만 한다.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는데, 잘 달리던 형 대우에게 문제가 생긴다. 철길과 나란히 달리던 대우가 멀리서 기차가 다가오자 마라톤 궤도를 벗어나 철길로 달려간다. 평소같으면 끝까지 형과 함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이모저모 쌓인 불만도 많고, 행주와 지만 때문에라도 대구는 애써 형을 외면하고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차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대우는 그만 사고를 당하고, 짧은 인생을 기차선로에 흩뿌리고 만다. 이후로 아버지는 페인처럼 형만 생각하며 지내며 그런 아버지를 보살피며 대구는 부둣가 잡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 대구 앞에 오랜만에 서울로 갔던 지만과 행주가 동시에 등장하고, 대구가 지기 위한 마라톤 그러니까 형 대우가 죽던 날과 마찬가지인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경기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
평소 드라마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옮기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런닝 구는 4부작으로 짧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첫 회 어린 시절은 그대로 영화같기도 하고 순정만화같기도 한 푸른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설혹 그런 경험 없이 자랐더라도 누구나의 추억이어도 좋을 예쁘고 깨끗한 시골마을이 배경이다.
모든 이의 추억이 정지용의 시 향수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있다는 아름다운 시보다 모자랄 것이 없듯이 4부작 드라마 런닝 구는 많은 사람의 직접적이건 혹은 가상이건 갖고 싶어 하는 어린 추억과 더불어 누군가의 경쟁에서 겪었던 아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체로 쓰리지만 그런 아픔이 묘하게 행복해지게 하는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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