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인 블로거 '디제'님은 프로야구 LG트윈스 팬임을 밝혀둡니다.

1993년 7월 16일 금요일 LG는 잠실에서 해태와 맞붙었습니다. 경기 전부터 내린 부슬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경기는 강행되었고, 야구장 전체의 관중수보다 1루 외야석을 채운 LG 계열사 신입 사원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해태가 LG 선발 김기범을 상대로 1회초 선취 득점했지만, 4회말 해태 선발 문희수에게 뽑은 이병훈의 동점타로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해태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을 5회말에 구원 등판시키는 초강수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6회말 이병훈이 선동열로부터 역전 좌전 적시타를 뽑아냈고, 7회말에는 신인 김경하의 3루타에 이어 박준태의 희생 플라이로 3:1 쐐기를 박았습니다. 김기범을 구원한 좌완 계투 강봉수가 승리 투수가 되었고, 8회초 등판한 김용수는 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세이브를 따냈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용수는 선동열과의 구원 대결에서 처음 승리해 기쁘다고 했고, 이광환 감독은 설령 패하더라도 9회말까지 선동열을 끌고 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대어를 낚았다며 반색했습니다. 당시 해태의 모 코치는 선동열이 패전을 떠안자, ‘1패가 아니라 10패’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 선동열이 조기에 구원 등판해 비를 맞으며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패했으니 팀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소회를 덧붙이자면, 당시 버스 안에서 워크맨으로 라디오 중계를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는데, 이병훈의 역전타가 터지는 순간, 승리를 예감하며 너무나 기뻤지만, 버스 안에서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를 순 없어서, 우산 꼭지로 애꿎은 버스 바닥을 두들기며 얼굴이 시뻘개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만큼 선동열을 꺾는다는 의미는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최근 구리에서 이병훈 KBS 해설 위원의 아들인 신고 선수 투수 이청하에게 아버지가 선동열에게 적시타를 쳐서 LG가 이긴 적이 있다고 말하니 금시초문인 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최근 2경기 연속 완봉승을 따내며, 5월 11일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인 17개의 탈삼진을 뽑아낸 LG를 상대로 류현진이 등판하자 한화는 승리를 따 놓은 당상이라 자신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언론조차 류현진이 당연히 LG를 상대로 손쉽게 3연속 완봉승을 달성할 것이라는 식으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LG는 더마트레의 호투와 타선의 집중력으로 류현진을 꺾으며 승리했습니다. 6월 1일 SK전 등판 이후 주말 두산전에 등판시키지 않고, 일부러 LG전에 맞춰 류현진을 등판시킨 한화의 계산이 어긋난 것입니다. 17년 전 선동열의 패배를 ‘1패가 아닌 10패’라 표현한 해태 코치의 언급처럼, 오늘 류현진의 패배는 역시 한화로서는 ‘1패가 아닌 10패’이며 LG의 입장에서는 ‘1승이 아닌 10승’의 값어치가 있는 귀중한 승리입니다.

수훈갑은 더마트레입니다. 5.1이닝 7피안타 2볼넷 무실점으로 류현진과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따냈습니다. 결정구가 부족해 투구수가 많아 이닝 소화 능력은 떨어지지만, 직구만큼은 상당히 인상적이며 어쨌든 2경기 연속 승리를 따냈습니다. LG는 외국인 선발 투수 ‘뽑기 운’이 극히 나빴는데, 연패를 끊어주는 역할을 해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습니다. 특히 경기가 거듭될수록 투구 내용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더마트레의 다음 등판은 일요일 기아전으로 예상되는데, 첫 등판 10실점의 치욕을 설욕했으면 합니다.

▲ LG 이택근 ⓒ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이택근이 LG 유니폼을 입은 후 처음으로 결승타를 기록했습니다. LG가 페타지니를 포기했던 것은 외국인 선수 2명을 모두 투수로 선택해 허약한 투수진을 보완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거액을 쓰고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이택근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좌타 일색으로 좌투수에 약한 LG 타선의 필연적 약점을 우타자 이택근이 해소해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수술 및 부상으로 인해 극도로 부진했던 이택근은, LG의 천적 류현진을 상대로 22이닝 연속 무실점에 종지부를 찍는 적시타를 터뜨렸는데, 실책으로 출루한 주자를 불러들이는, 한화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적시타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5회말 1사 만루의 기회에서 2구 직구를 놓친 뒤 연속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는데, 만일 이택근이 희생타를 기록했다면 뒤이은 타석에서 이병규가 어이없는 판정에 항의해 퇴장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류현진을 보다 빨리 강판시켜 비교적 편안한 흐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SK전 7회말 1사 2, 3루에서 이택근이 희생타를 치지 못하며 추가 득점에 실패해 역전패했는데, 중심 타자 이택근에게 중요한 것은 타율보다 타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2회말 무사 1루와 4회말 1사 2루에서 모두 뜬공으로 물러나며 진루타를 기록하지 못한 박병호의 타격도 아쉬웠습니다. 뒤이은 이진영이 직선타와 안타를 기록했던 점을 감안하면 박병호의 타격은 복기의 여지가 있습니다. 지난 주말 SK전 연패가 진루타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복기하면,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결코 발전할 수도, 승리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6회말 2사 1, 3루 기회에서 견제사로 물러난 권용관도 아쉬웠습니다. 타석에 들어선 김태완이 류현진에게 가장 좋은 타구 2개를 만들어 냈음을 감안하면 본 헤드 플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8회말 1사 1, 3루에서 병살타로 점수를 쌓는데 실패한 박용택의 타격도 안타까웠습니다.

반면 7회말 1사 3루에서 희생 플라이로 3:0으로 벌리며 한화의 추격 의지를 꺾은 정성훈의 타격은 훌륭했습니다. 그에 앞서 단타를 2루타로 만들고 3루를 훔쳐 기회를 만든 이대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개인이 아닌 팀의 승리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하느냐가, 아웃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당하느냐가 현재의 LG 타자들에게는 중요합니다.

최근 LG의 불펜진은 피로가 누적되며 매 경기 실점하며 경기 후반 흐름을 어렵게 끌어가는 빌미를 제공했는데, 오늘은 3.2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일요일 SK전에 팔 부상으로 등판하지 못해 덕아웃에서 역전패를 바라본 마무리 오카모토가 9회초 무실점으로 두 자릿수 세이브를 따낸 것도 다행입니다.

LG는 5월 11일 류현진에 17개의 삼진을 헌납하며 패한 이후 5연패의 수렁에 빠졌고, 5월 11일 이후 LG와의 청주 3연전을 스윕한 한화는 중위권 도약을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역으로 오늘 경기를 통해 LG가 4연패를 끊고, 한화는 2연패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LG 입장에서는 이번 3연전 첫 경기에서 류현진를 물리친 것이나 위닝 시리즈에 만족하지 말고 청주 3연전 스윕을 고스란히 되갚아 주기를 바랍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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