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헐리우드 액션을 소재로 한 어떤 클리셰다. “덤벼!”라고 소리친 후에 상대가 움찔하자 “이 자가 사람 친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꼴이다. 지금 이명박 전 대통령 측과 보수세력이라는 사람들의 행위가 그렇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 발표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분노’를 했다고 한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의 말은 정확히 이렇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 정치보복 운운한 데 대해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문장 그대로 볼 때 여기서 ‘분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에 대한 것이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게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다. 둘째, 정치보복의 배경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다. 셋째, 정치보복의 목표는 보수궤멸이다. 넷째, 주변 사람들 그만 괴롭히고 나에게 물어라(물으라는 게 말 그대로 문의를 하라는 것인지 검찰이 조사를 하라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누가 대통령을 맡더라도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사심에 의한 정치보복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와대가 굳이 ‘분노’라는 단어를 선택한 정치적 이유가 당연히 있겠지만 말 자체만 놓고 볼 때는 그렇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노골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진의를 왜곡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7일 오후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검찰의 특수활동비수사와 관련한 입장을 밝힌 뒤 밖으로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적인 친이계 인사로 18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조해진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께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모욕을 준 발언은 하나도 안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분노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이름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는 뜻은 아닐 텐데, 어떤 부분에서 분노를 느낀 것인지 저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분 이름을 입에 올리느냐”고 반응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봤듯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도 조해진 전 의원은 마치 그런 것처럼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 조해진 전 의원 뿐만이 아니라 자유한국당의 현직 의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런 발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지속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에 그게 뭐든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의도가 있어 보인다는 거다.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의 분노 발언이 나오기 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인터뷰를 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발언을 보면 그렇다. 김두우 전 수석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두고 “당신들이 과거에 겪었던, 또는 모셨던 분의 참담함을 너희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아마 이런 심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면서 “제가 입에 노골적으로 담기는 그렇다.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물론 노골적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도 죽으라는 것 아니냐”이다.

이런 발언의 어떤 인간적인 도리의 문제나 일반적인 도덕, 사회 지도층의 윤리 같은 문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대체 왜 이러느냐는 것이다. 의도는 뻔하다. ‘이명박의 죄’를 묻는 사건의 프레임을 ‘노무현 대 이명박’의 구도로 바꿔버리겠다는 것이다. 죄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의 문제를 똥 묻은 개와 또 다른 똥 묻은 개의 더러운 싸움으로 둔갑시키겠다는 것이다. 정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문제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입장 표명 이후 의혹은 ‘영부인’으로 번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윤옥 여사가 2011년 방미 기간 동안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받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이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의 입을 통해 언급되자 자유한국당은 마치 기계처럼 논평을 내놨다. “DJ 정부의 국정원 특활비,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특활비, 권양숙 여사의 640만불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영부인에는 영부인인가? 이명박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은 연이어 언론에 등장해 “우리도 가만있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계속 내보내고 있는데 이게 그 얘기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 조카사위 연철호 씨의 금품 수수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문제는 금품의 성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이명박 정부가 이 의혹을 수사할 당시 해당 금품을 빌린 것이거나 사업상 투자금의 성격이라는 입장으로 수사에 임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비극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진실은 검찰의 캐비닛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와서 다시 꺼내려 한들 당사자의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됐고 공소시효도 도과했다. 수사가 불가능한 사안에 대해 왜 수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정치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목적이 있어서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청와대 관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연합뉴스)

이런 뻔한 수가 가져올 효과를 따져 본다면 어떨까. 유감스럽게도 선거 공학이라는 측면에선 꽤 효과적이다. 스스로 궤멸의 위기에 놓인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이기도 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찌됐든 당시의 기득권이자 현재의 보수세력에 비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노력으로 당분간 보수언론의 지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오르내릴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괴한 국정운영에 학을 떼고 무당파가 돼있는 왕년의 보수정치 지지자들은 이 일을 계기로 서서히 다시 단결할 것이다.

이에 맞서는 정치공학을 말하기 전에, 이런 정치의 문법이 먹히는 우리 공동체의 실상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본질을 가치와 명분, 지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여정부 말기 정권이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경제적 파탄을 방치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던 걸 돌이켜보면 그렇다. 명분보다는 실리가 좋다는 유권자 심리가 “부자 되세요”를 내세운 이명박 정권을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부활한 보수정치는 9년 내내 ‘내로남불’만 되뇌며 자신들의 폭정을 합리화 했다. 가장 아픈 부분은 우리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이들과 비슷한 논리와 언행을 늘상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 가치와 명분을 말하는 정치가 이해관계에 춤을 추는 정치에 앞설 수 있다는 것을 시민의 힘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죄를 밝혀내고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해서 시민 스스로가 거듭나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적폐청산은 오로지 그게 가능할 때에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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