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 윤수현 송창한 기자] 상품권 페이 논란 이후 ‘방송의 을’들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다. 흔히 아나운서는 '방송의 얼굴'로 간주된다. 그러나 지상파 3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편ㆍ보도전문채널ㆍ케이블의 아나운서들은 거의 다 비정규직 노동자다.

종편, 보도전문채널, 경제 케이블 매체 로고(미디어스)

흔히 프리랜서 아나운서 하면 전현무, 김성주 아나운서 처럼 지상파에서 정규직을 하다가 퇴사 후 자유롭게 방송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부르는 곳도 많고 수입도 몇 배로 뛴다. 하지만 방송 뉴스를 담당하는 아나운서들은 이와 다르다.

이들은 주로 한 방송사에 속해 있지만 비정기적인 역할을 맡는다. ‘아나운서는 돈 많이 번다’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대부분의 프리 아나운서들은 정규직 아나운서보다 수입이 적다. 일정하지도 않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회사와 맺는 계약과 관련해 시정을 요구했다간 뒷감당이 되지 않는다. 업계가 좁아서 입소문이라도 잘 못 나면 다신 일을 구하기 힘들 수 있다. 대중에게 화려한 직업으로 인식되지만, 당사자들의 속은 곪아가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다수의 아나운서들이 인터뷰에 응했다. 이름과 직장명을 명기할 경우 역추적을 당할 우려가 있어 모두 익명 처리한다.

아나운서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계약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사항은 ▲도급계약서 ▲출연자계약서 ▲전속계약서 ▲계약서 미작성 등 크게 4가지다. 이러한 계약서에는 공통적으로 ‘며칠 이내 계약 해지 통보 가능’ ‘손해배상 청구’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4대보험, 학자금 대출은 기대할 수 없다. 연차도 없다. 쉬고 싶으면 본인이 대체자를 구해서, 수당을 못 받고 쉴 뿐이다.

‘불공정 계약서'가 있으면 그나마 형편이 낫다. 인터뷰에 응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은 한결같이 “80%의 회사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① 계약서 미작성 - "계약서 쓰는 회사가 비정상이에요"

A씨는 2007년 ㄱ경제 케이블 채널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정확한 처우를 알기 힘들었다. 출근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내 보수가 얼마냐’고 물어봤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어 “계약서?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10년 넘게 일하면서 계약서는 3번 써봤다”고 말했다. 현재 ㄴ경제 케이블 채널에 일하고 있는 B씨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지금의 회사와도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회사에선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계약서 미작성은 뉴스 아나운서 업무뿐 아니라 협찬사 프로그램 계약 때 자주 발생한다. 협찬사 프로그램은 특정 회사나 병원 등이 방송사의 시간대를 구입하고, 외주 제작사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송출하는 경우를 말한다. C씨는 “그럴 경우 구두계약으로만 진행하는 게 관행이다. 최악의 경우는 임금이 늦게 들어오는 경우”라고 밝혔다. 특히 “후불제라서 직접 독촉을 해야 한다”며 “애초에 계약서가 없기에 별다른 대응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계약서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제보자들은 모두 헛웃음을 지었다. D씨는 “계약서를 요구하면 아마 나가라고 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E씨도 “프리 아나운서들은 많고 일거리는 없다. 그런 요구는 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밝혔다.

사측은 계약서가 있어도 도급계약, 출연자 계약을 맺어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행법상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하지만 사측도 프리랜서에게 업무 지시를 내려선 안된다. 노무법인 삶의 홍종기 노무사는 “도급이나 출연자 계약을 맺었으면 사측의 업무지시나 간섭은 없어야 한다. 완벽하게 프리랜서여야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ㄹ보도전문채널의 계약서 중 손해배상에 대한 부분. 을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들어가있다(미디어스)

② 도급계약서라는 함정

“도급계약이요? 하는 일은 정규직과 똑같고 근로자성만 인정 안하겠다는 꼼수 입니다”

ㄷ보도전문채널에서 프리 아나운서로 일했던 C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휴일 근무를 강요하기도 하고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눈치를 주기도 한다. 능력껏 자유롭게 일 할 수 있는 도급계약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

‘기여도’를 이용해 아나운서들을 평가하고 업무를 강요하기도 했다. ㄷ보도전문채널에 다녔던 전현직 직원들은 '기여도'라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평가 항목이 오래전부터 있다고 증언했다. 회사가 프리랜서 계약상 지시를 내릴 순 없지만 '기여도'평가를 통해 사실상 관리·감독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 직원이었던 H씨는 “기여도는 회사에 얼마나 기여를 했냐는 뜻이다. 이게 해고 사유가 될 수도 있고 재계약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은 기여도가 능력이 아닌 '충성도'로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제보자들은 “주말·설연휴에 나오지 못하면 기여도가 떨어질까봐 불안했다. 계약 해지의 불안감에 쉬는 날도 회사로 향했다. 기여도가 떨어지면 새벽타임으로 갈 수도 있고 개편에 이름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벽타임으로 간다는 말은 사실상 나가라는 뜻"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이것 좀 해줄 수 있지?라고 묻는 사측은 부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프리랜서 입장에선 강압적인 업무 지시”라고 지적했다.

피해의식이 아니었다. 제보자들은 "불합리한 부분을 고치려고 해도 눈밖에 난다. 선배 한 명은 상황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다가 개편 때 새벽방송으로 차출됐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고됐다"고 밝혔다. 이 중 한 명은 "회사 내부에선 '미꾸라지 한마리가 분위기 다 망친다'는 식이었다. 새벽방송을 하는 모든 아나운서가 해고대상은 아니지만 그런 사례들이 쌓여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ㄷ보도전문채널은 계약서 상으론 겸직을 허용한다. 하지만 C씨는 "현실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ㄷ보도전문채널은 자사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에 눈치를 줬다. C씨는 “한 회사 일만 한다는 것이 프리랜서에게 좋은 말은 아니다. 원래 프리랜서는 능력에 따라 여러 채널에 출연한다. 대신 해고의 위험도가 높다보니 그런 걸 감안해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을 많이 하면 회사 관계자는 '걔는 돈 많이 버니까 (급여를)조금 줘도 괜찮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그런 말만 듣는 동료들은 짤릴까 무서워서 다른 방송을 하겠나"고 지적했다.

ㄷ회사만의 일이 아니었다. 프리 아나운서 F씨도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대부분의 방송사는 푼돈을 쥐어주면서 자기의 일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곳 출연을 아니꼽게 본다”고 전했다.

방송사 출연계약서 일부. 계약 해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미디어스)

③ 앵커, MC도 출연자?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출연자 계약’이란 방법도 등장했다.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에 나오는 앵커와 MC를 일반 출연자처럼 계약하는 것이다. D씨는 “다른 회사에서 프리 아나운서들의 퇴직금 논란이 있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회사가 우리를 출연자로 바꿨다”고 말했다. 한순간에 출연자가 방송을 이끌게 됐다는 얘기다. 출연자계약을 맺었던 E씨는 “직원이 아니라 출연자가 되었다. 박탈감이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신분이 바뀌니 처우도 달라졌다. 월급이 아니라 2주 단위로 ‘출연료’가 나왔다. 경력증명서를 뽑아달라고 했더니 출연확인서가 나왔다. D씨는 “우린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었다. 직원은 없고 출연자가 방송을 만들었다. 어이가 없었다”고 밝혔다.

출연자 계약서 중 손해배상에 대한 내용이다. 홍종기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 계약 금액 명기는 위법이다"라고 지적했다. (미디어스)

다른 보도전문채널도 마찬가지였다. ㄹ보도전문채널에 다녔던 B씨는 “우리 회사 역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모든 프리 아나운서와 계약서를 새로 썼다. 프로그램 단위로 회사가 아닌, 부장급 직원과 도급 계약이나 출연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 경우 업무 중에 문제가 생겨도 회사는 책임을 피할 수 있다.

E씨는 “특히 프로그램이 없어지면 나도 사라진다. 도급계약이나 출연자 계약을 맺기 때문에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아나운서가 있으면 그냥 ‘개편’하면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반적인 노동자로의 권리가 없어졌다”고 밝혔다. 계약직 직원만 되어도 받을 수 있는 휴가, 명절선물, 4대보험이 모두 사라졌다. 인터뷰에 응한 모든 아나운서들은 “어떤 형태의 계약이라 하더라도 프리 아나운서는 절대적 을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2016년까지 전속 계약으로 아나운서를 뽑았던 ㅁ방송사

④ '우리 회사 말곤 일하지 마'

한 회사에만 묶어두는 계약도 존재한다. ‘전속계약’이다. 이 계약서에는 '같은 권역 안에선' 겸업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지역 지상파인 ㅁ방송사에 근무했던 G씨는 “도급계약을 맺어 기본적인 대우(연차, 4대보험 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사에만 귀속시켰다"고 회상했다. ㅁ방송사는 아나운서에게 기본적인 노동자 혜택은 없지만 ‘다른 방송에는 출연할 수 없다’는 근무 조건을 달았다. G씨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은 도급제로 제약하면서 전속이라는 이름으로 프리 아나운서 특성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방송사는 최근까지 '전속직' 프리 아나운서를 채용했다.

ㅁ방송사 아나운서들이 사장에게 보낸 항의문 중 일부(미디어스)

ㅁ방송사 ‘전속’ 아나운서들은 계약 조건 때문에 2014년 사장실 점거에 나서기도 했다. 아나운서들은 “1년 근무 뒤 계약직 전환 여부를 검토해보겠다고 했지만 어떠한 입장도 듣지 못했다”며 “회사는 계약서 쓰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나운서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당시 국·팀장들은 ‘당연히 안 된다’ ‘(아나운서)일 쉬고 싶냐’는 식으로 반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프리 아나운서 중 한 명이 근로자성 인정 진정을 넣었고 노동부로부터 근로자성 인정을 받았다.

G씨는 “ㅁ 방송사만의 문제는 아니다”라며 “지방 방송사 대부분이 암묵적으로 다른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외부 행사를 나갈때도 회사는 보고를 하라고 했다. 사실상 관리하겠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계약서, 있어도 없어도 문제

인터뷰에 응한 아나운서들 모두 “회사로부터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C씨는 “방송에 참여하는 사람인데, PD와 작가 아나운서국 팀장들의 지시는 필수적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측은 ‘프리랜서’라는 계약 조건을 들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사측의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없는 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무법인 삶’의 홍종기 노무사는 “여러 직종에서 많이 발생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프리랜서는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인정받으려면 소송을 해야 하는데 좁은 업계 특성 상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집단적으로 나서거나 사회적 이슈화가 되어야 한다. 개별적인 문제제기로 사측은 변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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