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잘못 찾아온 작품들이 있다. 분명 같은 겨울이지만, 작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다르다. 그런데 새해 극장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생뚱맞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바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와 <코코>가 그 주인공이다. 뒤늦게 찾아온 이들 '크리스마스' 영화. 하지만 시절을 놓친 크리스마스 대신 각자 다른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그중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옛날이야기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의 인생이라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초등 6학년 2학기 국어 나 교과서에 실려 있다. 아니 교과서에 실리기 이전부터 '동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통과 의례'처럼 한번쯤은 읽어보았던 작품이다. 구두쇠의 대명사는 그 이름도 어려운 스크루지였으며, 우리 명절 동지에 찾아오는 팥죽을 무서워하는 역질 귀신은 낯설어도 크리스마스이브 구두쇠 스크루지를 찾아온 그의 옛 동료 귀신은 친숙했다. '자린고비'보다 '스크루지'가 더 익숙한 게 사실이었다.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 거기에 투영된 찰스 디킨스의 삶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 스틸 이미지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익숙하다 해서 그 작품의 저자인 찰스 디킨스가 익숙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흥부 놀부만큼이나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익숙한 스크루지를 탄생시킨 찰스 디킨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올리버 트위스트>나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의 작가라는 걸 연관시켜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당연히 작가의 생애는 더더욱. 바로 그 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작품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에겐 낯선 인물인 찰스 디킨스의 삶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시키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것의 작품화 역시 생소하진 않다. 하지만 굴곡진 어린 시절을 겪은 찰스 디킨스가 희대의 명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가면서 그의 비밀 서재가 마치 스크루지를 찾아온 말리처럼 작중 인물들과의 모의 장소? 심지어 그들에 의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 치료 연극 무대'로 변모하며 그 과정에서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고, 작가 자신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영화적 상상력은 스크린에 펼쳐진 찰스 디킨스, 그 예술가의 생애가 된다.

영화는 찰스 디킨스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그 유명세로 미국에서도 환대를 받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부에 맞게 끊임없이 더 많은 공사비를 부르는 그의 저택 등 그에게 손을 내미는 가계 경제와,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부진했던 그에게 얹힌 새로운 작품에의 요구다. 하지만 서재에 앉은 그는 단 한 줄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진척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새로 온 하녀의 아일랜드 옛날이야기, 거기서부터 힌트를 얻어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착안해 낸다.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 스틸 이미지

여기서 영화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크리스마스'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시한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자신과 이전 작품을 출간했던 출판사에 공표한 찰스 디킨스, 하지만 출판사 관계자들은 부정적이다. 이역만리의 대한민국까지 축제가 된 크리스마스, 그러나 정작 19세기의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 행사일 뿐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첫 번째 반전이 있다.

자신이 쓸, 아니 그 어떤 작품보다 쓰고 싶은 새 작품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꺼려하는 출판사와의 계약 대신 빛까지 얻어가며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려 한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크리스마스 시즌 전에 출간이 되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아직 시작된 안 된 작품의 일정은 너무도 빠듯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주인공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원맨쇼에 가까운 '산고'를 펼치는 찰스 디킨스의 고난이 시작된다.

찰스 디킨스,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스크루지와 갈등하다

영화의 배경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올리버 트위스트(2005)>, 팀버튼 감독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2007)>의 배경과 같은 19세기 영국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자본과 문화를 향유하는 '신사' 계급들이 클럽 등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한편에서, 이제는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상흔처럼 남아있는 잔혹한 소년 노동의 역사가 항존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극과 극의 세계에 바로 주인공 찰스 디킨스가 있다.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 스틸 이미지

작품의 베스트셀러로 프랑스풍의 최신 인테리어로 공사 중인 그의 집으로 상징되는 갓 신사가 된 그의 현실. 하지만 그 한편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불투명한 미래와 축적되지 않은 부로 인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그 위태로운 현실보다 더 불안한 건, '신사'연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파산한 아버지로 인해 구두약 공장에서 죽은 쥐와 폭력적인 강제를 견디며 버텨야 했던 소년 노동의 트라우마이다. 그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찰스 디킨스는 새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출간 날짜의 촉박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에게 돈을 대어주지만 대신 엄청난 고리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뜯어내는 변호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의 이름을 어렵사리 호명한 순간,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소설의 주인공 '스크루지'. 그리고 너그러운 그의 친구와 실제 아픈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여동생 내외,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인색한 부호의 장례식.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그가 조우한 인물과 상황을 빚어내어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내려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흔히 작가들이 자신이 작품을 쓰는 순간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그 '창작의 비밀'이 이 영화의 주된 그리고 매력적인 갈등 요소로 작동한다. 찰스 디킨스는 쓰려고 하지만, 정작 작품 속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그의 엔딩을 방해한다. 아니 그 자신이 세 아이, 조만간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평행선을 긋는 그와 그의 아버지의 불화가, 아니 좀 더 솔직하게는 '신사'였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그래서 평온한 가정의 맏아들이었던 그가 소년 노동자가 되었던 그 '신분 하락'의 트라우마가 스크루지라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 서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구두쇠라는 찰스 디킨스라는 예단과 그런 작가의 예단을 냉소하는 소설 속 주인공 스크루지의 갈등은 곧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아픔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찰스의 한계로 귀결된다.

영화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 스틸 이미지

물론 영화는 흔한 가족영화의 공식, 성장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불화했던 아버지와 아들은 화해하고 훈훈한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하며, 거기엔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숙하게 극복해낸 아들이 있다. 당연히 그 화해와 극복에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성공적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다.

덧붙여, 찰스 디킨스란 작가의 영업 비밀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배경은 인터넷과 미디어가 주된 문화콘텐츠가 된 21세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글자 문화의 현장이다. 단 한편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작가, 희귀신상 신발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 팬미팅도 아닌 작가의 새 소설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인해 그저 하나의 종교 행사였던 크리스마스를 전 세계인의 축제로 변모시킨 위대한 예술의 '간증'이다. 물론 그 간증의 일등 공신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찰스 디킨스 역의 댄 스티븐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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