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신문들이 대선후보가 내세우는 ‘거창한’ 공약을 검증 또는 분석하기보다 그대로 요약해 싣는 데 그치고 있다. 또한 후보들의 옷과 스타일에 지나치게 집중해 ‘이미지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신문 후보들이 거창한 공약 그대로 전달하기에 바빠

오늘자(14일) 조선일보는 5면 <바닥민심이 요동치고 있다>에서 정동영 후보가 여수 GS칼텍스 석유화학 공장을 방문해 “유류세를 20% 내리고 유통구조를 개선해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놨다고 보도했다.

▲ 조선일보 12월14일자 5면.
조선일보는 같은 면 <소액 불신자 300만명 구제>에서 이회창 후보가 경남 진주의 기자회견에서 “300만명의 생계형 소액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고 생계형 경제사범에 대한 대사면을 실시하겠다” 등의 ‘서민을 위한 12개 약속’을 발표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정부 세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류세를 내리면 구멍난 세수는 어떻게 메울 것인지, 유통구조를 어떤 식으로 개선해 기름값을 낮추겠다는 것인지 등등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다.

갑작스럽게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후보의 공약은 특히나 ‘실현가능성과 구체성’을 꼼꼼히 따져보고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게 언론의 기본 책무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회창 후보의 ‘서민을 위한 약속’과 같은, ‘전형적인’ 공(空)약을 그대로 내보냈다.

조선일보만 그런 게 아니다. 편의상 오늘자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했을 뿐 다른 신문들도 대동소이하다. 기름값에 허덕이는 서민과 소액 신용불량자들이 애통해 할 일이다.

비슷한 류의 기사는 수없이 많다. 그 중 지난달 30일 서울신문 3면에 실린 <서울 표몰이에 나선 이(李)·창(昌)·정(鄭)>을 보자.

서울신문은 “이명박 후보는 서울 명동의 신용회복위원회를 방문해 500만원 이하 고리 사채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증해 은행대출로 전환해 주기로 했다. …(중략) 정동영 후보는 국가가 청년 실업 탈출을 제도적·재정적으로 지원,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는 한편 ‘30만 청년 해외 파견-글로벌 인재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해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고 전했다.

요약하자면, “서울 표몰이에 나선 이명박 후보는 ‘소액사채 은행대출’을, 정동영 후보는 ‘30만 청년 해외파견’을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얘기다.

▲ 서울신문 12월14일자 3면.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20대 실업자, 사채를 빌려써야했던 서민들의 귀엔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험난한 관문들을 어떻게 뚫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후보들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대선후보들이 모든 유세 자리에서 자신들의 공약을 꼼꼼히 챙기긴 힘들 것이다.

문제는 언론이다. 대다수의 신문이 후보들이 외치는 구호를 그저 요약해 싣기에 바쁘다. 대선후보의 정책을 A·B·C·D처럼 등급을 매겨가며 분석하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함께 싣는 기사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오늘자 서울신문은 3면 <유세의 7가지 법칙>에서 대선후보들의 유세현장과 행태를 분석해 ‘7가지 유세 법칙’으로 정리했다. “대선후보들은 유세를 위해 주로 시장과 역 앞에 가고, 주메뉴는 국밥과 탕이며, 연설은 짧게 15분 안팎이며,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는 잠을 집에서 자고 이회창 후보는 지방 모텔을 전전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과연 7가지의 ‘법칙’으로 정리해야 할 만큼 중요한가.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신문에 공통적으로 실리는 게 있다. 바로 대선후보들의 옷, 연설, 이미지 등을 분석해 후보들만의 ‘스타일’을 분석하는 것이다.

대선후보의 ‘스타일’에 집중하는 언론, 대선후보가 연예인인가

▲ 중앙일보 11월30일자 3면.
지난 13일 조선일보 4면의 <주요후보 유세 스타일 비교>는 그 중 하나다. “이명박 후보는 이웃아저씨처럼 친근하고 어려운 말은 안 쓰며, 정동영 후보는 포옹으로 다가가며 호소하듯이 연설하고, 이회창 후보는 과거와 달리 연설 중간에 유머도 섞는다”는 것이 내용의 뼈대다.

조선일보의 이 기사는 흥밋거리로 한번 읽을 만은 하다. 하지만 실질적 내용은 없다. 언론이라면 대선후보들이 부풀려놓은 겉치레를 다 들어내고 알맹이(내용)를 추려내야 하건만 되레 언론이 ‘이미지 경쟁’ ‘스타일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30일 중앙일보는 3면 <감성대화 시대>에서 이명박, 이회창, 정동영 후보의 ‘인간적인’ 연설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명박 후보가 연설에서 “저기 미장원 하는 분, 장사 안되시죠?”라고 청중을 향해 물었고 정동영 후보는 “가슴 속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컨셉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유권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보일까? 게다가 ‘미장원 얘기’ ‘아픔 치유 대통령’과 같은 것은 대선후보들이 ‘서민 친화적 이미지’를 위해 전문가를 동원해가며 미리 철저하게 준비한 ‘컨셉’일뿐 아닌가. 유권자는 대선후보들이 부풀려 내놓은 ‘거창한 공약·컨셉·이미지’의 거품을 과감히 빼버리고 진실만을 보여주는 신문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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