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 갈수록 연례행사로 치르게 되는 건강검진이 두렵다. 시간을 내서 심지어 이제는 제때 나오지도 않는 대변까지 챙기고, 나이가 들수록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다스려 치러야 하는 그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기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이제 덜컥 어떤 병적인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오래된 육신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하며 들였던 가전제품들 중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신제품이 나와 교체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오래 써서 고장이 났다. 하물며 기계들도 그런데, 사람 몸 여기저기 잔고장은 점점 당연한 것이 되고, 생명이 오고가는 결과도 무람없이 들이밀어지는 나이이다.

그래서일까? 2017년 끝자락에서야 어렵사리 만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상영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화를 다보고 나와 화장실에 가니 휴지가 얼굴에 들러붙어 있을 정도로 눈물은 흐르고 또 흘렀다. 객관적 척도와 상관없이, 적어도 나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2017년 최고의 영화였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아버지 모금산, 영화를 만들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 이미지

금산 시내. 말이 시내지 흑백의 질감이 아니더라도 그 을씨년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골 도시’라는 이 언밸러스한 조합의 거리에 미스터 모의 마을 이발소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심심한 상호 '마을 이발소' 못지않게 더 심심한 삶을 살아가는 '뻥튀기 애호가' 모금산 이발사가 있다.

낙이라고는 뻥튀기 먹는 거 말고는 없어 보이는, 아직도 연탄난로 때는 이발소를 지키는 모금산. 아내와 아들이 떠난 빈집에서 버티며 수영과 수영이 끝난 후의 맥주 한 잔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이 나이든 남자의 일상은 '색깔이 사라진 흑백' 그 자체다. 변수라 봐야 같이 수영하는 아가씨와의 맥주 한 잔이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일방적 수다, 그 심심함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런데, 임대형 감독이 모금산 역에 기주봉 배우를 선택한 이유는 '몸에 배어있는 체념과 달관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루틴'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흑백의 색채감 때문이었을까? 밤이면 잠이 안 와 베개를 주먹으로 치다 깃털을 난무케 해버리는 불면의 일상,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똑같이 천변을 거닐어 마을 이발소를 여는 그의 무한반복의 삶에 누선이 터지고 만다.

무덤이 즐비했던 산을 깎아내고 본데없이 세워진 아파트. 그 아파트에 입주할 때만 해도 아내가 생존했었다. 그 아내가 잘생긴 남편과, 그 남편만큼 잘생겼다며 그걸 비디오에 담으려 할 때만 해도 윤기 나고 색감이 흘러넘쳤을 그의 삶은 이제 아들 방 책상에 쌓인 먼지처럼 되었고, 그 먼지가 쌓인 시간만큼 그와 그의 가족을 벌어 먹여 살려주었던 마을 이발소도 낡았다. 그리고 그만큼 모금산도 나이가 들었다.

기주봉 배우가 묵묵하게 채워 넣는 일상, 그 '시간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오며 겨울을 버티는 나무처럼 나이 들어가며 견뎌내는 삶에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희한하게 영화는 보여주지 않은 그가 견뎌온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만든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 이미지

하지만 무심히 버텨내는 것도 쉽지 않다. 마을 보건소 의사가 모금산에게 큰 병원에 가볼 것을 청한다. 위암이 추측되는 상황, 과연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일상을 근근이 버텨가는 듯한 모금산의 선택은? 뜻밖에도 그가 선택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모금산은 영화감독 지망생이지만 뜻한 바에 길이 막혀 방황하고 있는, 모금산이 평가하기에 덜 떨어진 아들 스데반(오정환 분)과 그의 '똑 부러진 이쁜이 여친' 예원(고원희 분)을 금산으로 불러 내린다. 스데반의 방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격조했던 이들 부자의 관계, 그 시간과 비례하여 멀어진 간격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영화가 툭 던져진다. 그리고 장발 아들이 이발사인 아버지의 이발을 거부하듯, 감독 아들은 아버지의 영화를 거부하고 본다. 그러나 소품부터 준비를 시작하며 영화를 밀고 들어오는 아버지, 거기에 '어떻게 저런 덜 떨어진 아들에 이쁜이 여친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던' 예원이 반응을 보이며 아버지의 영화가 시작된다.

그저 아버지, 마을 이발소를 지키던 노땅 아버지와 영화를 만들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모금산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트롯이나 들을 것 같은 마을 이발사 모금산.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준비한 영화 속 캐릭터는 '찰리 채플린'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좋아했던 찰리 채플린과, 아버지가 좋아했다던 스티브 맥퀸을 비롯한 그 시절의 배우들이 소환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맞선을 본 다방과 그곳의 계란 동동 쌍화차가 세대를 건너 스데반과 예원의 가운데 놓여지고, 마지못해 시작된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연인의 시간 여행 '로드 무비'가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친 뜻밖의 출생의 비밀.

위트 넘치는, 그러나 어른스런 아버지의 영화, 아버지의 삶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포스터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한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 등장한다. 시한부 판정에 출생의 비극까지. 그런데 이 극적 요소들이 모금산 씨와 만나면서 '어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유효한 소재가 된다.

무료한 삶을 버텨온 모금산 아버지는 시한부일지도 모를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뜻밖의 사건에, 영화제작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는, 이제 영화감독을 포기하려는 아들에게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야지'라는 아버지의 설득이다. 또한 영화 속 그가 선택한 캐릭터는 그가 아닌, 이제는 곁에 없지만 남의 자식 딸린 자신을 기꺼이 잘생겼다며 거둬준 고마운 아내가 좋아했던 찰리 채플린이다. 아내에게 뒤늦게 바치는 헌사랄까?

아버지의 병을 알고 당황한 아들에게, 혹은 비록 짠 음식일망정 그를 돌봐주려 했던 그의 동생 내외 등 그의 친지들에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병을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통해 위로한다. 심지어 그 영화를 통해 뒤늦게, 어쩌면 자신이 없을 세상에 아들 녀석에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혈육을 찾아주는 포석까지 깔아놓는다.

스물도 안 된 철부지 시절 아들 스데반을 낳고, 영화배우의 꿈을 따라 상경하여 도시를 전전하던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낸 모금산은 이발 기술을 배우고 선으로 만난 아내와 구석에서 이발소를 하며 '어른'으로의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혹은 버텨왔던 어른의 삶처럼, 이제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병조차 기꺼이 어른스럽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 이미지

남들에게는 위로라지만, 평소엔 말 한 마디 없이 동네 중학생 녀석의 인사조차 무심히 지나치고,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간 수영장 동료 아가씨의 수다에 무반응과 달리, 매일 매일 꼼꼼하고 해학 넘치게 채워간 그의 일기와 같은 '위트 넘치는 그만의 결론'이다. 또한 매일 홀로 수영장을 찾은 외로운 아가씨를 향해 뿜어낸 그의 물분수처럼 '치기 넘치는 어른스런 배려'이다.

젊은이들에게 모금산의 삶은 참 쓸데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연배가 상관없이 모금산의 삶은 무료하고 적막하다. 하지만, 그 무료함과 적막함은 어쩌면 그가 일기장에도 숨겨놓은, 치열했던 삶의 부산물이다. 이제 그 부산물조차 여의치 않는 상황, 과연 늘그막에 찾아온 병의 의미는? 자신의 병을 시한폭탄이란 위트로 넘기듯, '어른' 모금산에게 병은 어쩌면 그 심심한 일상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살거나 살지 못해 죽거나처럼. 그냥 그건 책임감 있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의연하고 거뜬한 삶에 대한 자세라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아버지 모금산이 살아온 삶을 거창하게 칭송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낡은 이발소가 여전히 기능하듯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이제는 초라해지고 사라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삶을 흑백의 화면을 통해 설득한다. 기주봉이 연기한 덤덤한 일상, 그의 외로움과 그가 견뎌온 시간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운 영화. 그리고 비록 종종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려하는 스데반과 예원을 통해 아들 세대를 긍정하는 영화. 거창한 화두와 관계에 대한 담론이 없이도,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의 삶을 포용하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덤덤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보여준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톺아보기 http://5252-jh.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