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새해가 밝았지만 정치 환경이 새로워질 일은 없을 것 같다. 기만적 갈등을 반복하는 나날이 계속될 운명이다.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를 둘러싼 말들이 이런 상황을 예고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예상됐던 방식으로 온건한 발언을 내놓았다. 평창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 가능성을 시사했고 확인된 바 없는 핵 능력을 과시했다. 다소 의외의 지점이라고 한다면 미국을 제쳐놓고 남한 정부와 대화를 전제한 메시지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통미봉남(通美縫南)을 봉미통남(縫美通南)으로 바꾼 모양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의 제고에도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화 진도가 진척되지 않는 것과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실질적 일정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을 반영한 메시지일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올해 2월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은 지난 보수정권 기간 동안 특히 악화된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에 대한 기대감을 다양한 자리에서 여러 차례 내보인 바 있다. 북한이 여기에 호응한 것은 그래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북한의 유화적 메시지는 화전양면 전술이며 또 다른 군사적 도발을 위한 시간 벌기일 뿐이다. 대화를 제안해놓고 뒤로는 도발을 준비하는 행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보수세력의 시각에서 북한의 메시지가 특히 고약하게 여겨지는 지점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균열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매우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권은 이러한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기 쉬운 조건을 형성하는 행보를 지속해왔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적 시도를 한 게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끌려가면서 미국과 멀어졌고 북한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남북관계 개선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문재인 정권은 아마 여기에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보호 없이 북한의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정치와 언론을 통해 드러난 보수세력의 현실 인식이다.

김정은 2018년 신년사 발표

보수세력의 국제정세에 대한 진단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북한의 대화 공세는 남북관계의 진전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 것이지만 동시에 현 정부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다. 그것은 북한과 남한의 단기적 선택이 초래한 문제라기보다는 현 상황에서 남북문제를 실질적으로 풀기 위해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다.

예를 들면 남북관계가 여전히 미중관계의 종속변수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대화의 제스추어를 취한 상대는 남한 정부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는 착시일 수 있다.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한미군사훈련의 축소 또는 연기와 대북제재 해제이다. 양쪽 모두 미국의 결단이 없으면 현실이 되기 어렵다.

동시에 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와도 직결된다. 특히 대북제재 해제 문제는 최근 미국 일부가 내놓은 해법인 해상무역봉쇄와 맞물려있다. 해상무역봉쇄의 근거는 중국과 러시아가 공해상에서 선박을 통해 북한에 원유를 공급해 대북제재를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정부 역시 최근 억류된 선박들의 사례를 공개해 이런 근거를 뒷받침한 바 있다.

이러면 중국과 러시아의 불성실한 대북제재 이행에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전쟁과 불공정무역 카드를 양손에 쥐고 중국을 압박할 것이다. 이 결과는 갈등의 장기화이거나 ‘빅딜’이다. 빅딜의 결과물은 동아시아 특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강화, 주한미군 철수 또는 규모 축소, 북핵에 대한 사실상의 방치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 정부로선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개입 자체를 포기해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은 보수정권이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이 상황의 책임을 문재인 정권에 모두 돌리며 이 모든 게 대화를 중시하는 어떤 유화적 태도의 산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성실하고 부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재인 정권이 어찌됐건 이런 현실을 돌파해나갈 당사자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를 놓고 정치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것은 권력의 책임과 정치적 불성실을 명확히 구분해 논하는 공론(公論)의 조성이다. 그런데 지금 그럴 수 있을만한 환경이 조성돼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선일보 2일자 1면

조선일보는 2일 국회 헌법개정특위 자문위가 거의 사회주의적 내용의 헌법 개정안 초안을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란 말을 없앴다거나 기간제 파견근로 등의 폐지 및 정리해고 금지, 노동자의 경영참여 등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유한국당이 권력구조 개편 이외의 부분에서 자기 역할을 방기한 게 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국회 헌법개정특위 자문위가 마련한 개헌안 초안이 ‘사회주의’라고 부를만한 것인지의 문제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결국 조선일보가 보내는 ‘신호’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현재 자유한국당의 개헌 논의에 대한 입장은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함께 하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로드맵이 ‘정략적’이란 이유로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자신들을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아 고립시키고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다른 야당들과의 갈등을 유발하려는 것 아니냐는 거다.

이러한 태도는 공학적으로 볼 때도 수세적이다. 개헌 논의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이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조선일보의 보도는 그저 ‘정략’에 반대하는 정치가 아니라 보수적 가치라는 이념적 깃발을 내세우는 정치를 주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략적 개헌논의에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적 개헌에 반대한다’로 전술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1일자 지면에 보수세력이 혁신이니 뭐니 하면서 서로 싸우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묻지마 단결을 통해 문재인 정권을 막아내야 한다는 김대중 씨의 칼럼을 싣기도 했다.

진보와 보수가 각기 이념적 지향이라는 노선을 놓고 정책적 대결을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런 시도는 응원할만 하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나 앞서 언급한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 등을 볼 때 보수세력이 그러한 건전한 방식의 대결을 하자는 다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더 문제는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이 다수파라는 이유로 이러한 기만적 정치로 빨려 들어가는 다른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2일자 지면에 실린 박성민 씨의 칼럼이 그렇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하면 자유한국당을 제치고 대안적 보수정당이 될 수 있고 그러려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선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담대한 연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정치의 파탄을 ‘공학’이 부족해서 생긴 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우리의 불행한 오늘은 노선적 지향은 없고 ‘공학’만 말하는 정치 때문에 생겼다. 2018년은 좀 달랐으면 하지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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