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해결이 반복되어야 이야기가 풀리는 드라마에서 매회 문젯거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나 몇 회에 걸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배열하고 그것들이 해결되면서 주인공이 점점 더 성장해 나가는 이병훈 PD 식의 사극에선 주인공 주위엔 언제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죠. 동이의 신출귀몰, 혹은 오지랖 넓은 탐정놀이는 그녀의 궁극적인 성장 단계인 숙종의 성은을 얻어 일개 천민에서 영조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각종 암투와 모략과 함께 이어질 것입니다. 장희빈의 악녀 각성과 인현왕후의 폐위를 다루는 지금의 흐름은 이런 전체적인 그림 중 하나의 굴곡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동이가 궁궐로 들어와 감찰부의 임무를 수행하며 벌어지는 이런 문제들이 만들어지고 해결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갈등 요인들의 원인을 그들의 감정선 줄기를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겹쳐지는 하나의 원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바로 제작진이 새롭게 조명했다던, 이전의 왕과는 색다른 모델을 보여주고 싶다며 야심차게 그려내고 있는 조선의 주인. 지진희가 연기하는 숙종이 그 문제의 원인이죠. 사실 동이를 보고 있으면 임금 하나만 정신 차리고 현명하게 대처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로맨티스트, 혹은 낭만과 풍류를 즐기는 왕. 갑갑한 궁궐 생활과 왕으로서의 부담감에 힘겨워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접근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특히나 세습에 의해 권력을 손에 쥔 정상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만무하고, 그 외로움과 막막함에 짓눌려 망가지고 일그러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니니까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동경하고 그래서 자주 궁궐 벽을 넘나들며 소시민의 삶을 엿보는, 그 와중에 동이에게 마음이 끌려버린 친근한 왕으로 속종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알겠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왕의 친근함과 일탈에 대한 욕구를 보여주는 시도는 새롭기보다는 전형적이기까지 하니까요.

하지만 드라마 동이에서의 숙종은 그 지점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 동이에서의 지진희는 그저 인정 많고 사랑에 솔직하고 매사에 따스한 인간으로서의 왕이 아니에요. 그는 자신의 힘과 권한에 대해 의도적일 정도로 마주보지 하지 못하며 회피하고, 그 책임을 태생의 탓으로 돌리며 그저 사랑 놀음에만 탐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국면에서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결국 동이의 맹활약으로 문제는 종결되죠. 철없고 무책임한 로맨티스트, 혹은 짜증나는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 왕이라니. 동이를 불편한 사극으로 보는 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숙종의 너무나도 순진한 척하는 행동도 한 이유를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는 너무나 왕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해요.

아예 모른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자이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파벌로 갈라진 정치 현실에 절망하기도 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안들을 궁리하고 적용하기도 하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에는 그런 인식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과 총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하나의 작은 손짓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과 운명이 걸려있는지를 잘 알면서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너무나 헤프게 애정을 남발하죠. 겉으로 보기에야 낭만적이고 폼 나는 것 같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행동을 확실하게 정하지 못하는 숙종의 밍기적거리는 태도 때문에 인현왕후는 절망하고, 장희빈은 악녀가 되어가고, 동이는 궁궐 음모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중신들은 물론 주위의 모든 이들이 그 배려 깊음과 사람 좋음 속에 숨겨진 우유부단함과 머뭇거림을 파악하며 계산할 정도로 얄팍한 숙종의 심성은 결국 동이의 모든 사건들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자 파국의 시작입니다.

뭐 그래도 대장금에서 맛있구나만 연발하던 임호보다는 사정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추노나 구르믈 벗어난 달 속 조선 시대의 임금님들처럼 같이 근래 만들어진 사극 속의 왕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미덥지 않은 모습으로 각색되어 보여주긴 하네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사극이라지만 이렇게 한결같이 덜떨어진, 미숙한 왕들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한심하기만 합니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세상인데 드라마 속 왕이라도 좀 그럴듯했으면 하는 게 요즘 저의 심정이거든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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