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액션 l 안경남] 허정무 감독의 월드컵 플랜은 크게 두 가지다. 아시아지역 예선 내내 대표팀의 주요 전술로 활용된 4-4-2와 강팀 혹은 원정에서 효과를 본 4-2-3-1이 그것이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현재로선 두 가지 시스템이 B조 상대국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6일 에콰도르전에서 대표팀은 4-4-2 시스템을 사용했다. 넘버원 이운재를 대신해 정성룡이 골문을 지켰고 이정수 대신 곽태휘가 조용형의 파트너로 경기에 나섰다. 중원에선 김재성이 오른쪽 미드필더로 이청용의 자리를 메웠고 신형민은 기성용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출격했다. ‘캡틴’ 박지성은 변함없이 왼쪽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최전방에선 이동국과 염기훈이 호흡을 맞췄는데, 이날 염기훈의 공격수 기용은 최근 페이스가 떨어진 이근호와 부상 중인 박주영을 염두 해둔 것으로 분석된다. 허정무 감독은 “염기훈은 스트라이커로서 충분히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측면과 전방을 오가는 멀티플레이어로 활용할 계획이 있음을 밝혔다. 염기훈을 기용해 공격진에 긴장감을 불어 넣고, 동시에 새로운 전술 카드를 실험하고자 하는 허정무 감독의 의도였다.

에콰도르전은 평가전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경기였다. 본선에서 만날 아르헨티나를 가상한 평가전 상대라고는 하나, 주전급 선수 대부분이 빠진데다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아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허정무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실전 보다는 실험에 더 큰 무게를 뒀다. 그동안 주전으로 나오지 못한 정성룡, 김동진, 곽태휘, 김재성, 신형민, 염기훈 등이 선발 출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최종 엔트리 옥석을 고르기 위한 선수 중심의 실험만이 치러진 것은 아니다. 허정무 감독은 해외파와 국내파를 적절히 섞어 새로운 조합을 실험했고, 공격수 염기훈을 활용해 경기 중에 플랜A와 B를 동시에 선보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염기훈과 박지성의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지였다. 두 선수는 서로 자리를 바꾸며 상대를 혼란시켰고 염기훈이 좌측면으로, 박지성이 중앙으로 이동하며 4-4-2가 4-2-3-1로 변했다. 경기 중에 플랜A와 B를 모두 가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이처럼 선수 교체 없이 시스템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는, 최전방에 염기훈이 기용됐기 때문이다. 본래 측면 미드필더인 염기훈은 공격수로 출전했지만, 상황에 따라 자주 측면으로 빠지며 크로스 내지는 돌파를 시도했다. 이때, 박지성은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이동해 염기훈이 빠진 자리를 메웠고, 기성용은 신형민과 더블 볼란치를 구성하며 상대 역습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스템의 전환뿐 아니라, 염기훈의 등장으로 인해 대표팀의 공격 루트 역시 더욱 다양해졌다. 박지성과 이청용의 경우, 좌우 측면 모두 소화가 가능하지만 주발이 오른발인 까닭에 왼쪽 측면에선 크로스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한번 접은 상태에서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릴 경우에는 타이밍이 늦어지는 단점이 있다.

반면, 염기훈이 박지성과 위치를 바꿔 측면으로 이동할 경우 크로스의 정확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또한 올 시즌 박지성이 중앙 미드필더로 뛰어난 활약을 벌인 점도 두 선수의 포지션 체인지가 가지는 장점 중 하나다. 박지성의 압박 능력을 최전방에서부터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염기훈의 날카로운 왼발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성용이 대표팀의 전문 키커로 나서고 있으나, 왼발 스페셜리스트 염기훈의 선발 기용은 세트피스에서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염기훈을 활용한 박지성 시프트는 향후 공격수의 경쟁 여부에 따라 본선 무대에 활용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앞으로 예정된 일본, 벨라루스, 스페인과의 평가전 결과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표팀의 제1공격 옵션인 박주영과 이근호의 부활과 부상 중인 이동국의 회복, 그리고 이승렬과 안정환의 최종 23인 합류에 따라 염기훈의 입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경쟁은 이제부터다. 염기훈의 등장이 대표팀 시스템에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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