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 한 세대 인물들이 공통으로 겪은 모종의 사회적 사건 등을 되새김하는 일종의 '반추' 장르이다. 아직도 종종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문학과 문화 콘텐츠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대 '운동권 후일담' 문학의 범람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이제 또 우리는 '후일담'의 한 조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세월호' 이야기다.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지난겨울 전 국민이 촛불을 들었고 정권이 무너졌다. 그리고 드디어 물속에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는 지난 12일 내년 봄의 추가 수색 비용까지 지불하며 세월호 그 실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세월호 선체 영구보존 논의까지 수면 위로 올라온 시점, 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조사와 수사가 진행되는 만큼 대중의 뇌리에서 세월호가 흐릿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 그동안 노란 리본을 내걸고 잊지 말자를 외치던 '문화'의 영역에선 무엇을 해야 할까?

세월호 그 후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 오멸 감독의 ‘파미르’ 편

그 첫 응답은 지난 12월 9일 JTBC <전체관람가>에 등장한 독립영화계의 대표적 인물 오멸 감독을 통해서였다. 그는 단편영화 <파미르>를 통해서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자전거를 타고 친구가 가고 싶어 했던 파미르로 홀로 떠난, 이제는 청년이 된 친구의 여정을 담았다. 세상은 무뎌지고 잊어가지만, 정작 그곳에 함께 있었던 당사자들 그리고 가족들에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시간들, 그 남은 이들의 '시간'에 대해 영화는 답한다. '간다고, 가지만 종종 오겠다고', 즉 살아가겠지만 잊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온 세월호처럼, 아직 2014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오멸 감독은 용감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도 있었다. 2015년 뜬금없이 홈쇼핑에서 귤과 함께 앨범을 판매하며 돌아온 루시드 폴의 정규 7집 속 노래들은 '세월호'의 아이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잠언'과도 같은 음악들이었다.

친구들은 지금쯤/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재난 현장에 다시 선 주인공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10일 종영한 OCN 드라마 <블랙>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무진이라는 가상의 도시, 타임마트라는 건물붕괴 사고와 그 사고 현장의 아이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은 부도덕한 집권 세력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가상의 도시, 가상의 사건이지만 누구라도 이 드라마를 통해 '끝나지 않은 세월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한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편의 '재난' 드라마가 등장한다. 바로 11일 시작된 JTBC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다.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드라마는 '스페이스 S몰'의 붕괴 사고로 시작된다. 동생 연수의 촬영 현장에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억지로 끌려갔다가 잠시 남자 친구와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문수(원진아 분). 동생은 그 사고로 죽고, 문수도 겨우 구조된 후 문수네 가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 술로 살며 동네에서 억지로 분란을 일으켜 욕을 먹으며 산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의 접착제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 자기 안의 자책과 슬픔을 꾹꾹 누르며 문수는 씩씩하게 살아간다.

문수와 함께 건물 더미에 갇혔던 강두(이준호 분)의 처지는 '더 나빠질 게 없는' 처지이다.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사고와 함께 돌아가셨다. 3개월 만에 깨어났지만 무능력한 엄마는 식당을 하다 날리고 덜컥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신용 불량자가 된 그는 나이트클럽 해결사에 막노동으로 번 돈을 의대 다니는 여동생에게 보내며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붕괴 사고로 죽은 48명 외에 한 사람의 희생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잘못된 건물 설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설계사의 아들 서주원(이기우 분).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던 그는 건물붕괴 사고가 아버지의 설계 잘못이 아니라 사업주 청유건설의 잘못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잃어버린 사랑과 아버지의 오명뿐이다.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드라마는 이 세 명을 다시 현장에 불러 세운다. 청유건설이 그 자리에 세우겠다는 '바이오 타운', 그 설계를 서주원은 기꺼이 맡았다. 그리고 그의 사무소에서 건축 모델러를 하던 문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서주원의 말에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온다. 자신이 일하던 나이트클럽 마담 빽으로 현장 야간 경비원으로 들어가 추모비를 부수며 그 사건을 잊어가는 세상에 울분을 토하던 강두 역시, 과거의 사건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서주원의 청을 받아들인다. 각자 자신이 짊어진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주인공들은 과거의 현장에서 상처를 마주하고,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뭉친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의 캔디 같은 여주인공 문수, 밑바닥을 전전하며 비극적 낭만주의의 전형 같던 남자 주인공 강두, 그리고 엘리베이터조차 못타는 여주인공을 기꺼이 스카웃하고 그녀가 세상과 마주하도록 배려하는 전형적인 키다리 아저씨 서주원. 이 전형적인 삼각관계 거기에 재벌가의 정유진까지 합세한 사각관계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스페이스 몰 붕괴라는 재난사고의 '트라우마'를 얹으며 드라마는 현실에 발을 들인다. <눈길>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 데 빛을 발한 유보라 작가는 이렇게 '재난 후일담' 장르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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