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에서 '20번'이라는 등번호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바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현 올림픽팀 감독)가 13년간 함께 한 등번호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축구팬들은 '한국 축구의 7번'하면 '캡틴박' 박지성(맨유)을 쉽게 떠올립니다. 그만큼 등번호는 축구 선수에게 상징과도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저 등 뒤에 선명하게 새겨진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등번호지만 그 안에는 축구에 대한 다양한 정보 그리고 암호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수 역시 등번호에 따라 이런저런 얽힌 사연들이 많은 경우도 있는데요. 과연 축구, 그리고 월드컵에서 등번호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등번호 10번을 달고 있는 박주영(좌) 등번호 7번을 달고 있는 박지성(우)(사진-엑스포츠뉴스)

등번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28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기 중에 선수 구별이 쉽지 않아 이미 1907년부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등번호 도입이 추진됐지만 시범 추진은 그로부터 무려 21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범과 논의를 거쳐 정식 경기에 등장한 것은 1933년 에버튼과 맨체스터 시티의 FA컵 결승전이 최초였습니다. 이후 1937년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전에서 사상 처음으로 A매치에 등번호가 도입됐고, 1954년부터 월드컵에도 등번호가 도입돼 더욱 확산, 정착되게 됐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등번호는 관중이 선수를 알아보기 편하게 하고,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다 효과적인 경기 운영을 위해 도입됐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1번 GK, 2-5번은 수비수, 6-8번은 미드필더, 9-11번은 공격수를 의미했으며, 교체 선수는 12번 이후의 번호를 배정한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수 구별, 포지션 뿐 아니라 선수를 두드러지게 하는 색다른 요소,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등번호의 의미는 진일보했습니다. 감독이 무조건 번호를 매기는 방식 역시 탈피해 최근에는 선수의 의사가 반영된 등번호가 더욱 두드러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월드컵에서는 나름대로 규정을 둬서 23명의 엔트리에 맞게 1-23번 사이에 번호를 부여하도록 했고, 1번은 무조건 골키퍼가 맡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운재의 등번호가 1번인 것을 보면 쉽게 알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여도가 높은 선수에게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영구 결번은 어려운 실정입니다. 하지만 규정과 전통에 따르면서 선수 개인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는 등번호를 부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등번호가 바로 10번입니다. 이른바 '팀의 에이스'이자 모든 플레이에 관여할 만큼 대단한 기량을 갖춘 선수에게 부여되는 번호가 10번입니다. '축구 황제' 펠레를 시작으로 디에고 마라도나, 미셀 플라티니, 지네딘 지단, 델 피에로, 프란체스코 토티, 호나우지뉴 등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들이 10번을 거쳐 갔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천재, 리오넬 메시 역시 현재 대표팀과 바르셀로나에서 10번을 달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스트라이커 박주영이 10번을 달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마디로 뛰어난 기술로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고 슈팅, 패싱 능력도 갖추며 경기를 해결할 줄 아는 최고의 선수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바로 10번입니다.

행운의 숫자, 7번도 빼놓을 수 없는 등번호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기술이 좋고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난 선수에게 주로 7번이 부여돼 왔는데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과 최고의 미드필더 루이스 피구 등 주로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들이 이 숫자를 등에 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박지성이 7번을 달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7번을 달아 피구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9번은 한 팀의 주득점원이 주로 달고 있는 숫자입니다.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을 갖고 있는 브라질의 스타, 호나우두와 아르헨티나의 스트라이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이 번호를 달았으며, 이번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후보인 스페인의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토레스 역시 9번을 달고 있습니다. 그밖에 카카, 프랑크 람파드 등이 달고 있는 8번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상당히 빠른 선수의 대명사로 굳힌 11번은 아르연 로번, 라이언 긱스, 오베르마스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로 많은 축구팬들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수비수들의 경우에는 주로 2-4번을 다는 경우가 많으며, 5번과 6번은 중앙 미드필더들이 많이 애용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전통적인 등번호 부여 방식에 선수 개인의 스타일이 잘 접목된 케이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파괴하고, 스스로 두드러진 활약을 통해 색다른 상징으로 굳히게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14번을 달고 나온 요한 크루이프는 '토탈 사커'의 중추 역할을 담당해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14번=크루이프'라는 등식을 성립시켰습니다. 또한 프랑스 스트라이커인 티에리 앙리는 자신의 우상인 반 바스텐을 닮겠다는 의미로 12번을 달고 있으며, 독일의 최고 스트라이커로 꼽혔던 위르겐 클린스만은 18번을 달고 강한 인상을 심었습니다. 독일의 '중원 사령관' 미하엘 발락은 서양 문화권에서 '불운한 숫자'로 불리는 13번을 달아 자신을 상징하는 숫자로 키우는데 성공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홍명보는 대표팀 막내 시절, 그야말로 '떨이 번호'였던 20번이라는 숫자를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함께 해 와 한국 축구에서 신성시하는 숫자로 정착시켰습니다. (현재 20번은 이동국이 달고 있습니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등번호로 인한 특이한 해프닝을 이야기한다면 단연 이반 사모라노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인터밀란에서 9번을 달고 뛰던 사모라노는 1997년 브라질의 호나우도가 이적하면서 9번을 요구, 이름값에 밀려 등번호를 빼앗겼습니다. 화난 사모라노는 결국 수학기호인 +를 이용해 18번에다 1+8을 넣어 절묘하게 9번을 살리는 묘안을 짜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터키의 하칸 슈쿠르가 54번 등번호를 받고 5+4를 만들어 9번을 살려냈고, 18번을 원했던 안토니오 카사노가 99번을 받아 9+9를 만드는 등 사모라노 이후 유독 자신이 집착하는 숫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나온 기발한 숫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 500번을 유니폼에 새긴 김병지 (사진-엑스포츠뉴스)

최고의 축구 스타로 꼽혔던 호나우지뉴는 이탈리아 AC 밀란에 입단해 10번을 받기를 원했지만 팀의 대선배인 셰도로프가 이미 10번을 달고 있어 자신의 생일 년도(1980년)를 딴 80번을 배번받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지단의 박치기 사건에 연루돼 관심을 모았던 마르코 마테라찌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열렬한 팬이라는 의미로 조던의 등번호인 23번을 자신의 상징처럼 달고 있으며, 한국 최고의 골키퍼, 김병지는 K-리그 통산 500경기 출장을 상징하는 500번 등번호를 받고, 지난해 500번째 경기인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뛰기도 했습니다. 등번호는 이렇게 선수 개인의 기호에 맞게, 또 색다른 팬 마케팅으로 활용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를 앞두고 각 국의 엔트리 역시 속속 발표되고 정리되면서 기존의 스타는 물론 새롭게 떠오를 스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월드컵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치면서 가장 인상에 남을 선수, 그리고 등번호는 어떤 숫자가 될 지, 월드컵을 바라보는 색다른 관전포인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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